사인공(휘 순문)우화사실 |
燕山傳曰沈 順門 爲掌令時言御衣廣狹此亦指上之言欲罪之何如政丞及政院啓曰沈順門其時新入中國見衣服甚廣濶故以此啓之然言御衣廣狹不當矣傳曰以人臣而仰見御服固非矣遂命下獄禁府啓杖八十宥旨前事傳曰沈順門言所不當言勿論赦前收職牒付處遠方(此謫開寧時事)
燕山傳曰前日加鄭沈資而有上疏指言沈問安閤門者其考承旨李繼孟啓曰鄭沈加資時臺諫上疏彈駁有一疏只錄問安之語而無鄭沈之名臺諫則閔暉尹金孫金千沈順門權憲趙世輔傳曰雖不直書鄭沈之名疏中有坌集問安之語予常記憶是乃疑上而言也令義禁府鞠之沈順門雖被可拿致鞠之傳曰金千雖首唱沈順門以上官爲下所牢不能止之順門等決杖八十政院啓觀其疏中語盖疎族而問安者也似不屬上傳于政院曰疏云族親問安坌集閤門非徒指鄭沈是必隱有指的其心之奸甚矣千當陵遲處死閔暉等處斬書進啓曰此事無正律依毁棄制書則爲首者只處斬而傳敎如是故以此書啓且近來糾正風俗故罪人皆律外論斷令則風俗大變請依律斷之何如傳曰千陵遲籍沒其餘姑以死囚囚之憲等疏毁削之 燕山甲子九月傳曰戊午之黨負才結交非議朝事例周亂臣幷加罪領相成俊及其子景溫南秋江孝溫朴挹翠誾曺梅溪偉李黿李胄朴漢柱權達手權柱康伯珍李繼孟承旨鄭誠謹輔德趙之瑞直提學沈順門大諫姜詗正郞姜謙佐郞金宏弼承旨洪湜朱溪君深源李幻寧宦者金處善皆被慘禍世云甲子之禍甚於戊午 世鼎家藏云吾先世中遭屯艱家乘多闕幸窃科第忝入史局得考列聖實錄吾先事實載在國乘者庶可因是考見而分務有限不得全意於私僅得若干事實以備家藏而至於五代祖被禍之後必有史臣直筆而燕山日記經亂不秩終不得見是則不肖平生之恨也世鼎得窺國乘然後始知公之被謫以言御衣廣狹被禍以言鄭沈加資事世鼎嘗見野史曰姜暉沈順門俱爲舍人皆有所眄妓鄭校理鵬曰亟己之否者且有後悔渾從之沈不果未幾妓入爲燕山麗媛大幸沈竟陷非命云盖鄭沈之論出於憲府故憲府多官皆被其禍而金千以發論爲罪首野史云云之說何從而出耶豈雲程(鄭鵬字)嘗有是言而妓果爲麗媛公之遇禍適與時會故好事者作爲是說耶是又吾宗不可不辨者也(公猷家藏) 8세조 사인공(휘: 順門)이 화를 당한 사실 연산군이 전지(傳旨)를 내려 말씀하기를 심순문이 장령으로 있을 때 임금의 옷이 넓고 좁은 것을 말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임금을 지적하여 말 한 것이므로 죄를 주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정승과 승정원이 아뢰어 말하기를 심순문이 그때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옷이 매우 넓은 것을 보았으므로 이로써 아뢰었으나 임금의 옷이 넓고 좁은 것을 말한 것은 부당한 일 입니다 하자 전지를 내려 말씀하기를 사람의 신하로써 임금의 옷을 우러러보는 것은 진실로 그릇된 일이라 하고 드디어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니 의금부에서 곤장 80대를 치고 그전 일은 용서해 줄 것을 아뢰었다. 전지를 내려 말씀하기를 심순문이 부당한 말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니 그전 일은 용서하고 직첩을 몰수하고 먼 곳에 귀양 보내라 하였다. (이것은 개녕에 귀양갔을 때의 일이다) 연산군이 전지를 내려 말씀하기를 전날에 정침(鄭沉)을 정삼품으로 가자(加資)하였을 때 상소(上疏)한 가운데 정침을 온 집안이 문안하였다는 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그 상고하여 보라 하니 승지 이계맹(李繼孟)이 아뢰어 말하기를 정침을 가자할 때 대간(臺諫)의 탄핵(彈駭) 상소에는 다만 문안(問安)의 이야기만 기록하였고 정침의 이름은 없었으며 대간은 민휘(閔暉) 윤금순(尹金孫) 김천령(金千嶺) 심순문 권헌(權憲) 조세보(趙世輔)였습니다 하니 전지를 내려 말씀하기를 비록 정침의 이름을 직접 쓰지는 않았으나 상소중에 무질서하게 떼지어 모여들어 문안하였다는 말이 있었던 것을 내가 항상 기억하고 있으니 이는 임금을 의심하여 말한 것이다. 의금부로 하여금 국문케하고 심순문은 비록 귀양갔으나 잡아다 국문하라 하고 전지를 내려 말씀하기를 김천령이 비록 앞장서서 주창(主唱)하였으나 심순문은 상관으로써 아랫사람들의 에워싸는 바가 되어 능히 제지하지 못하였으니 순문 등에게 곤장 80대를 치라 하였다. 승정원이 그 상소한 중의 말을 보고 대개 일가가 많지 아니하여 문안한 것이요 위에 부탁하지 않은 것 같다고 아뢰니 승정원에 전지를 내려 말하기를 상소문에 일렀으되 온 집안이 떼지어 문안하였다는 것은 다만 정침을 지적하였을 뿐 아니라 이것은 반드시 은연중 그 마음의 간사함이 많음을 지적한 것이니 김천령은 마땅히 능지처참(陵遲處斬)하는 극형(極刑)으로 다스리라 하고 민휘등도 처참하라 하니 글을 써서 아뢰기를 이것은 바른 법이 아니니 훼기죄(毁棄罪)에 의하여 임금이 조칙을 내려 수창(首唱)한 자만 처참해야 하나 전교가 이 같으니 글로써 아뢰고 또한 근래 풍속을 바로 잡았으므로 죄인이 모두 법률 외의 일을 논하지 않는 것은 풍속이 크게 변한 것이니 청컨대 법률에 의하여 처단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지를 내려 말하기를 천령은 능지처참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그 나머지는 아직 사형수로 가두고 권헌등은 상소에서 삭제하라 하였다. 연산군이 갑자년 九월에 전지를 내려 말하기를 무오년의 무리들이 재주를 믿고 교분을 맺어 조정을 비난하여 말하는 사례가 있으니 난신(亂臣)들에게 모두 죄를 더 주라고 하여 영의정 성준(成俊)과 그 아들 경온(景溫) 남추강(南秋江) 효온(孝溫) 박읍취(朴挹翠) 은(誾) 조매계(曺梅溪) 위(偉) 이원(李黿) 이주(李胄) 박한주(朴漢柱) 권달수(權達手) 권주(權柱) 강백진(康伯珍) 이계맹(李繼孟) 승지 정성근(鄭誠謹) 보덕 조지서(趙之瑞) 직제학 심순문 대사간 강형(姜詗) 正郞 강겸(姜謙) 좌랑 김굉필(金宏弼) 승지 홍식(洪湜) 주계군(朱繼君) 심원(深源) 이환영(李幻寧) 환자(宦者) 김처선(金處善)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으니 세상사람들이 갑자사화가 무오사화보다 더 심하였다고 말하였다. 세정의 가장(家藏)에 말하기를 우리 선세(先世)가 중간에 어려움을 만나 없어진 것이 많으나 다행히 과거에 급제한 일이 사국(史局)에 들어 있고 열성조(列聖朝)의 실록을 보면 우리 조상의 사실이 국사에 실려있는 것을 상고하여 볼 수 있으나 공무가 한정되어 있어 사사 일만 오로지 생각할 수 없어 겨우 약간의 사실을 얻어 가장에 갖추었고 5대조가 화를 당한 뒤에는 반드시 사관의 사실대로 쓴 것이 있었을 터인데 연산일기가 난리를 겪어 정돈되지 아니하여 끝내 볼 수 없으니 이것이 불초의 평생 한이다. 세정이 국사를 얻어본 연후에 비로소 공이 임금의 옷이 넓고 좁은 것을 말함으로써 귀양간 것을 알았고 정침에게 가자한 일은 세정이 일찍이 야사를 보니 말하기를 강휘 심순문은 모두 사인 벼슬에 있으면서 기생의 곁눈질 하는바가 되니 정교리 붕(鵬)이 빨리 그만 두라 그렇지 아니하면 후회할 것이다 하자 강휘는 그것을 좇고 심순문은 그러지 아니하였는데 기생이 들어가서 연산군의 사랑하는 기생이 되어 크게 은총을 받고 심순문은 마침내 비명에 갔다 하였으니 대개 정침의 말이 사헌부에서 나왔으므로 사헌부의 많은 벼슬아치가 모두 그 화를 받았고 김천령이 발설하였다고 하여 죄를 으뜸으로 받았다고 야사에서 말하였다는 것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정붕이 일찍이 이 말을 하였는데 과연 기생이 연산군의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없고 공이 화를 당한 것이 마침내 그 때와 맞으므로 일을 좋아하는 자가 지어낸 말이 아닌가 이것이 또한 우리 일가가 분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공유가장) 曉窓公 墓誌一叚 栗谷銘知敦寧沈公墓誌曰公諱逢源議政府舍人 贈領議政諱順門之子議政公以忠見戮於燕山公早丁家禍不能就外傅母夫人授以小學等書云云 율곡이 지돈녕 심공의 묘지명을 지어 말하기를 공의 휘는 봉원이니 의정부 사인 증영의정 휘 순문의 아들이다. 의정공이 충신으로써 연산군에게 화를 당하여 공이 일찍 집의 화를 맞아 밖으로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지 못하고 어머니가 소학등의 글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