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위공(휘 규)묘표 |
충의위공 휘 규 묘소 |
嗚呼此長城南二十里內馬芍藥洞負亥原卽我十五世祖承旨公十四世祖忠義衛兩世衣履之藏而半千年間忠義衛公墓前訖無片碣豈不爲子孫之痛哉今與宗族合謀竪表謹按公諱珪官忠義衛而事蹟無徵靑松之沈以高麗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爲上祖六世祖諱淵閤門祗侯五世祖諱龍靑華府院君高祖諱德符左政丞靑城伯諡定安曾祖諱繼年知成州事入我 朝不仕遯跡於安城實旺寺變名亡命於咸鏡道北靑 太祖以物色訪之累徵不就隱於珍原山中祖諱涓永樂文科除監察拜殿中御史 贈吏曹參判 太宗稱善特題御誄詞考諱宗夏左承旨考妣位在公墓上合封有表石是生三男伯瑾通仕郞仲珪忠義衛季璣通德郞仲卽吾所蒙祖也配宜人光山李氏戶曹參判時止女也生三男長諱希文副司直贈兵曹參議孫淸參奉曾孫公綽 中宗朝掌令不仕從遊金河西子孫居本鄕次諱希湯別坐孫沃僉中樞曾孫應禮禮賓寺正 贈吏曹參議子孫世居井邑 扶安數至千指噫公與兄弟諸公奉承庭訓不赴應擧卜築村後竹林頂上尙志隱遯克述先德以裕後昆
檀紀四二九六年 br春三月 十四世孫 br雨澤 撰 8세조 br충의위공 휘 규(珪 )묘표 아아 여기 장성에서 남쪽으로 20리에 내마 작약동 해자원(內馬芍藥洞 亥坐原)은 즉 우리 15대조 승지공과 14대조 충의위공의 兩代의 산소인데 오백년동안 충의위공(忠義衛公)의 묘앞에 아직도 비석이 없으니 어찌 자손의 마음 아픈 것이 아니리오. 지금 일가들과 의논하여 묘표를 세우려고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규(珪)요 벼슬은 충의위였고 사적은 증거가 없다. 靑松沈氏는 고려조의 문림랑 위위시승 휘 홍부(洪孚)가 시조요 6代祖 휘 연(淵)은 합문지후였고 五代祖 휘 용(龍)은 청화부원군이었으며 고조의 휘 덕부(德符)는 좌정승이요 靑城伯이며 시호가 定安이요 증조의 휘 계년(繼年)은 지성주사였고 朝鮮朝에 들어와 벼슬하지 않고 안성의 실왕사(實旺寺)에 자취를 감추고 이름을 고치어 함경도 北靑에 몸을 숨기니 이태조가 물색하여 찾아 여러번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고 진원산중(珍原山中)에 숨었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연(涓)이니 永樂연간에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에 제수되고 전중어사(殿中御史)에 임명되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太宗이 착함을 칭찬하여 초상때 특별히 제문을 지어 보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宗夏니 좌승지였고 고비위(考쯼位)의 묘는 공의 묘 위에 합폄(合窆)하였고 표석이 있다. 이 분이 3男을 두었으니 장남은 근(瑾)으로 통사랑(通仕郞)이요 2男은 규(珪)로 충의위이며 3男은 기(璣)로 통덕랑이고 2男 규가 나의 소몽조(所蒙祖)이다. 배위는 宜人 光山李氏 호조참판 時止의 따님으로 3男을 두었으니 장남의 휘는 희문(希文)으로 부사직이었고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손자 淸은 참봉이요 증손 공작(公綽)은 中宗朝에서 장령벼슬을 내렸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여 자손이 본향에 살고 있다. 2男의 휘 희탕(希湯)은 별좌(別坐)요 손자 옥(沃)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며 증손 응례(應禮)는 예빈시정(禮賓寺正)이었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대대로 정읍과 부안에 살아 그 수가 수천에 이른다. 아아 공과 형제 諸公이 가정의 교훈을 이어 받들어 과거길에 나가지 않고 마을 뒤 죽림의 정상에 집을 짓고 생각하는 것을 고상하게 하고 숨어서 살며 능히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후손에게 전해 주었다.
檀紀4296年 봄 3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