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역수호기 |
忘世亭公(諱璿) 墓域守護記
우리 沈門의 顯祖이며 7世祖이신 贈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行嘉靖大夫 諱 璿 忘世亭公께서는 黃海 京畿 監司를 지내시고 端廟遜位때 棄官歸鄕하신 後 朝廷에서 여러차례 불렀으나 誓死不變 志節로 나가지 아니하시고 構亭 扁以 忘世하시니 因하여 八賢에 오르시고 事載莊陵誌와 國史邑誌等이다. 그 高貴하신 忠節을 높이 받들어 士林에서도 龜巖祠에 뫼시어 每年 享祠를 올리는 顯祖이시다. 忘世亭公께서는 1467년(世祖 13年 丁亥) 9月 20日 別世하시어 現在의 墓地인 梧南面 陽地里 山 2番地 辛坐에 葬禮되신이후 530餘年間 우리 後孫들이 守護와 維持管理는 勿論 每年 春秋로 全國의 子孫들이 모여 정성어린 절사를 올리면서 지내오던 近 600餘年이 된 宗山인데 1950年 6․25戰爭으로 公簿가 소실되어 未登記財産이 되었던 忘世亭公 墓域 林野를 良惠公(諱石雋) 墓域 守護에 主導的役割을 하신 鍾益公(派宗會 初代會長)께서 墓下에 居住하던 宗人 5人 名義로 名義信託하여 1970년부터 1975년까지 6年間 管理케 하였다가 1976年에 명의신탁을 해제하고 派宗中 名義로 登記를 마치고 잘 받들어 뫼시고 있던 中 五人 名義의 한 사람인 鐘悳의 養子 軒求가 鐘悳이 死亡한 後 信託解止인락 되었으며 있지도 않은 宗中으로 登記되었으니 무효이며 위 林野中 五分의 一持分을 돌려 달라는 訴訟을 提起하여 大宗會 明求 會長任(仁壽府尹公派宗會 顧問)과 派宗會 永求 副會長任, 大宗會 前 總務理事 相弼任 派宗會 總務 載冕等이 1995年 7月부터 1999年 12月 7日까지 무려 만 四年 五個月동안 의정부 및 서울의 法庭에 每月 재판때마다 暴暑와 酷寒을 무릅쓰고 證人으로 혹은 참관인으로 꼭 참석하였으며, 良惠公(諱石雋) 墓域守護에 큰 일을 하신 明求會長任께서 이들에게 단 一寸의 땅도 내어줄 수 없다는 信念으로 고령임에도 앞장서서 이끌며 독려하심은 勿論, 法庭에 提出키 爲한 墓地確認 測量때는 公의 墓域 山1~山2번지 全域에 散在해 있는 40餘基의 先代墓地를 直接 確認 踏査하시고 또한 재판중 재정적 뒷받침등 物心兩面의 지원으로 이 재판에서 勝訴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또한 우리 派宗會 晶求會長께서는 當時 四選 國會議員으로서 國事에도 바쁜데 訴訟의 좋은 結果를 이끌어 내기 爲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最善을 다하여 큰 役割을 하였고, 또한 이 訟事에 全國의 一家분들의 아낌없는 團結된 協助와 物心兩面의 聲援에 勇氣百倍하였다. 그러나 부정한 宗人이 1997年 12月 中旬경 서울 高等法院에 불복 항고하여 亦是 每月 一回式 재판이 進行中이었을 때 1998年 3月 16日 부정 宗人 容求子 昌植外 7人(五人中 1인 美國 居住)이 또 前記 부정자와 合同하여 그들의 持分을 반환하라는 訴를 提起하여 事件이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宗會에서는 즉시 또 변호사를 선임하는 等 제반조치를 강구하고 每月 진행중인 재판에 대비키 爲하여 제반자료 및 증거준비 서면등을 취합하여 法院에 제출해야 하는데 市廳의 各種 新·舊 臺帳 謄本과 其他 증빙서를 준비하기 爲하여 여러차례 왕래하여야 하였으며 李朝實錄 및 公의 행적등 資料수집과 公의 墓域內의 40餘基의 先代墓마다 詳細한 資料를 把握하고 사진촬영 및 測量을 하여 法院에 증거로 제출하는 等 關係書類만도 乘用車로 한 트렁크는 足히 될 程度였다. 이상과 같은 노력으로 高法에서도 1999年 5月 12日 勝訴하였고 다시 大法에서도 1999年 12月 7日 亦是 事必歸正으로 勝訴判決을 받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訴를 提起한 그 부정 宗人은 祖上의 유택을 잘 보호유지 하는데는 안중에도 없고 이성을 잃어 祖上任께 큰 罪를 짐은 勿論 人間으로서 道理를 忘却한 참으로 개탄스런 사람들이다. 금번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된 사람들에 대하여 1999年度 總會에서 단호히 규탄하고 우리 宗中에서 割宗措置 및 庚辰 大同譜에서도 除籍해야 한다는 決議까지 한 바 있었으나 明求會長님의 만류로 유보되었다. 여기에는 大略 記述하였으나 그 긴 歲月동안 明求會長님을 爲始하여 關係하신 모든 분들이 노심초사 하면서 고생한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분노를 금할 수 없다. 其他 보다 詳細한 일들을 다 기록치 못하였으나 다시는 이와 유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이를 교훈으로 삼고저 간략하게 기술하고 할아버지 墓前에 再拜합니다.
2002年 壬午 8月 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