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亂)을 피한 사실

공숙공 휘 회 신축 사당
소재지:파주 월롱면 영태리


최감사(崔監司) 현(睍) 인재(認齋)의 문집에 말하기를 조선조 초에 심정승(沈政丞) 회(澮)가 어렸을 때 가화(家禍)로 종이 등에 업고 난을 피하여 선산부(善山府)의 강거민(康居敏)의 집에 가서 맡기니 康이 길러서 아들을 삼고 財産을 모두 주었다.
居敏이 죽음에 3年동안 상복(喪服)을 입었고 조정으로 돌아온 뒤 康의 처 전씨(全氏)가 죽음에 公이 政丞으로써 내려와서 시묘(侍墓)살이 하고 상복도 먼저 강씨 때와 같이 하였으나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하고 미담(美談)이 되었으니, 생(生)이 일선지(一善誌)에 이미 밝혔다. (生은 崔公 자신을 말한 것임).
一善誌에 말하기를 世宗朝 初에 태종(太宗)이 상왕위(上王位)에 있을 때 심온(沈溫)이 왕후(王后)의 아버지로서 대대로 政丞이 되어 위세(威勢)나 권력(權力)이 너무 컸으므로 사사(賜死)되어 가문(家門)의 화(禍)가 크게 일어났다.
온(溫)의 아들 회(澮)는 나이가 아직 어렸으므로 종이 등에 업고 난(亂)을 피(避)하여 망장(網障)의 康居敏의 집에 가서 맡기니, 居敏의 집은 부자였으나 아들이 없어 회를 길러 아들을 삼았다.
거민의 죽음에 喪服을 입고 그 아내의 喪에도 公이 政丞으로써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가서 심상〔心喪:상복은 입지않데 마음으로 애모(哀慕)하는 일〕하고 侍墓살이를 하였다. 一善은(선산의 별호요, 망장〔網障〕은 그 작은 지명이다).
공동기록(公同記錄)에 말하기를 선산에 사는 康公은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강거사(康居士)라 하였다. 집은 거부(巨富)였으나 두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 항상 석불(石佛)에 빌어 아들을 낳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하루는 이상한 꿈을 꾸었기에 조령(鳥嶺)에 가서 기다리고 있자 公이 종의 등에 업혀 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데리고와 길러 아들을 삼았으나 康公의 아내 全氏가 公에게 척고(戚姑)가 된다는 것을 처음에는 몰랐고 장성(長成)하여 강 공이 公과 두 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니 公이 받고서 말하지 않고 있다가 康公이 죽은 뒤 公이 벼슬길에 나가 있을 때 康氏의 조카를 찾아 거사(居士)라 정(定)하여준 뒤에 그 받은 財産을 모두 주었다. 善山 정언(正言) 능식(能栻)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공의 자손으로써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벼슬을 한 사람은 善山을 지나갈 때 모두 康公의 墓에 성묘하였고, 능식 또한 대소과에 합격하였을 때 모두 다 성묘하였다고 하였다. 강공은 벼슬이 주부(主簿)였으나 연산군(燕山君)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입었고 사인(舍人) 강백진(康伯珍)이 즉 그 종손(從孫)이다. 舍人의 後孫이 선산과 임실(任實)에 많이 살았고 강생(康生) 사순(思淳) 또한 사인의 후손이다.
말이 이와 같고 또 善山의 康氏가 모두 공숙공(恭肅公)의 일을 잘 안다고 말하였다. 우리 집에 옛부터 정하여 내려온 말에 비록 康公을 居士라고 일컬었으나 인재 崔公이 선산 사람이고 또 선배의 문식(文識)이 있는 사람은 거민 이라는 것이 옳고 거사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며 康思淳 또한 말하기를 그 방조(傍祖)의 벼슬은 주부요 휘는 居敏이라고 하였다.
公의 묘문(墓文)에 이른바 양모족고전씨(養母族姑全氏)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며 공의 어머니의 外祖가 재신(宰臣). 전성안(全成安)이었으니 어머니의 외척(外戚)인데 척고(戚姑)를 족고(族姑)라고 잘못 일컬은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