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정공(휘 구)묘갈명 |
면암정공 휘 구 묘소 묘 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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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전남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
通訓大夫吏曹佐郞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面巖亭沈公墓碣銘竝書
維湖之南治曰貝城鄕曰福內原曰天柱枕子而崇四尺者面巖亭沈公宅也久無顯鑱後裔權淳以經香太史韓公之狀謁余語謹按公諱曰溝字曰渭叟別字曰面巖靑松氏以高麗文林郞諱洪孚爲鼻祖再傳諱龍勳封靑華府院君寔公曾王考也王考諱德符本 朝左議政靑城伯諡定安考諱義龜義禁府判事妣金氏籍尙州父判書南釰以永樂丁亥生公公生而天資魁梧才器聰雋纔能言己受小學勵志實踐及成童博通文史尤用力於性理書 世宗朝以經學選除典牲署叅奉歷禮賓寺主簿 宗廟令典籍執義工禮吏三曹佐郞累佩郡 有循良之稱雅牲忠直而見時政有闕失遂敷衍六府三事之義反覆詳陳 上嘉之曰一介微官堂堂廊廟器也 正統戊辰以叔父安孝公讒禍事抗顔直言爲權奸所忤謫南徼者五年遷寶城旋蒙宥及聞莊陵遜位遯于桂舫山中戢景藏采 世祖物色訪之 命召者三陳疏終不起從弟恭肅公力勸造朝公曰與其騰翥而尸素曷若沉滯而全安也乃因樹傍巖搆一小亭以詩矢志嘯歌偃仰與世相忘戒子孫曰吾死之後勿書官職只稱林泉居士可矣 弘治癸丑考終于獐項里第自 上聞之曰惜乎林泉寒士沈溝卒遣官致侑仍命葬師爲占吉岡特 贈左承旨盖殊恩也配全義李氏正郞瀅女有壺德生卒無傳葬用魯禮擧二男曰由訥僉正曰由剛有學行叅奉 贈吏曹叅議僉正男曰河正郞叅議男仁源主簿曰恭源以孝行薦除漆原縣監不就贈禮曹叅判嗚呼公之所養剛方正直立朝敢言以盡臣職聞善如渴見利若流行坎止一於其義百世之下孰不聞風而起敬哉公之世旣遠事行之傳者特十之一二耳然晩年大節壁立千仞可與生六臣者爲之伍苟有彛性者其何忍任其泯也遂取前修之緖論爲之銘銘曰 靑鳳家世英才超倫道以爲志義以安身其位雖屈其言必伸 王曰嘉乃昭代藎臣理有消長世隨平陂至誠憂國讜言不避噫彼羣邪信然傍伺萬死投荒一心無愧 賜環之際適値危疑茫茫宇宙我安歸之秋江梅月炯照襟期竄伏窮山如聾如癡當面石丈萬磨不磷我詩賴公壽百千春 蓍雍執徐維夏中旬 通政大夫前秘書院丞 安東 金寗漢 撰 통훈대부이조좌랑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면암정심공묘갈명병서(번역문) 호남(湖南)의 보성군(寶城郡) 복내면(福內面) 천주동(天柱洞)에는 자좌(子坐)로 사척(4尺) 높이가 된 무덤이 있으니 이는 면암정(面巖亭) 심공(沈公)의 유택(幽宅)이다. 오래토록 묘전(墓前)에 비갈(碑碣)이 없었는데 후손(後孫) 권순(權淳)이 여러차례 향화(香火)를 지내고 대제학(大提學) 한공장석(韓公章錫)씨가 지은 행장(行狀)에 의하여 초안을 작성하고 나를 찾아와 심공(沈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줄 것을 말씀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公의 휘(諱)는 구(溝)요 자(字)는 위수(渭첤)요 별자(別字)는 면암(面巖)이라 한다.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고려 문림랑(文林郞) 휘 홍부(洪孚)가 시조가 되고 3世에 휘 용(龍)은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봉군(封君)되니 이 분이 公의 증조부되시며 조부의 휘는 덕부(德符)니 조선조 좌의정 청성백(靑城伯)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며, 고휘(考諱)는 의구(義龜)니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이고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김씨(尙州金氏)니 판서(判書) 남일(南휢)의 따님이시다. 1394年(太祖3年 甲戌)에 公이 출생(出生)하셨는데 公은 출생하면서부터 천품(天禀)이 특이(特異)하고 재조(才操)가 총명(聰明)하여 겨우 말을 할 나이에 소학(小學)을 배워 뜻을 닦고 실천(實踐)하였으니 성동(成童)이 되어서는 널리 문사(文史)에 통(通)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힘썼다. 세종조(世宗朝)에 경학(經學)으로 선발(選拔)되어 전생서(典牲署) 참봉(叅奉)에 등용(登用)되고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 종묘령(宗廟令) 전적(典籍), 집의(執義), 공조(工曹), 예조(禮曹), 이조(吏曹) 삼조(三曹)의 좌랑(佐郞)을 역임(歷任)했으며 성창(成昌), 홍산(鴻山), 홍천(洪川), 태인(泰仁)등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나아가서 선량(善良)하다고 칭송(稱頌)받고 아성(雅性)이 충직(忠直)하여 시정(時政)에 결함(缺陷)이 있음을 보았을 때는 드디어 육부삼사(六府三事:財物의 구성요소 여섯가지와 正德, 利用, 厚生의 三事)의 책임(責任)을 부연설명하고 반복하여 자세히 진백(陳白)하니 上게서 가상(嘉尙)히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일개(一介) 미관(微官)이 당당(堂堂)하니 조정(朝廷)의 큰 그릇이라』 칭찬하셨다. 1448年(正統戊辰)에 숙부(叔父) 안효공(安孝公)의 피화사(被禍事)로 항의직언(抗議直言)했다가 간신(奸臣)들의 미움을 받아 남방(南方)에서 귀양살이 五年동안을 했으며 보성(寶城)땅으로 옮겨 살다가 죄(罪)를 용서받았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했다는 소식(消息)을 듣고서는 계방산중(桂舫山中)에 은둔(隱遯)하여 외출(外出)을 금(禁)하고 살으셨다.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여러 방면(方面)으로 찾아서 세 차례나 불러드렸지만 상소문(上疏文)을 진달(進達)하고 마침내 나아가지 않으셨다. 종제(從弟)되는 공숙공(恭肅公)께서 조정(朝廷)에 나갈것을 힘주어 권(勸)했더니 公의 말씀이 『어찌 침체하고 있으면서 몸을 온전히 보전(保全)함만 같겠는가』하셨다. 그리고는 수방암(樹傍巖)을 기대어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짓고 거처하면서 시(詩)를 지어 뜻을 맹세하고 노래를 읊고 오르내리며 세상(世上)과는 서로 잊었다. 자손(子孫)에게 교훈(敎訓)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는 관직명을 쓰지 말고 다만 임천거사(林泉居士)라고만 함이 옳다』고 하셨다. 1493年(弘治癸丑)에 장항리(獐項里) 제택(第宅)에서 별세(別世)하시니 上(成宗)께서 들으시고 『애석(哀惜)토다! 임천한사(林泉寒士) 심구(沈溝)가 졸(卒)했구나』 말씀하시고는 관원(官員)을 보내 예장(禮葬)을 돕고 지사(地師)로 하여금 길지(吉地)를 점(占)하게 하고 특별(特別)히 좌승지(左承旨)로 증직하니 이는 이례적(異例的)인 은전(恩典)이다. 배위(配位)는 전의이씨(全義李氏)니 정랑형(正郞瀅)의 따님이다. 부덕(婦德)이 있었으나 생졸년대(生卒年代)는 전(傳)하지 못하고 예장(禮葬)은 유교식(儒敎式)으로 하였다. 2男을 두니 유눌(由訥)은 첨정(僉正)이요, 유강(由剛)은 학행(學行)이 있어 참봉(叅奉)이며 증직(贈職)이 참의(叅議)이다. 첨정(僉正)의 아들 하(河)는 정랑(正郞)이고 참의(叅議)의 장남(長男) 인원(仁源)은 주부(主簿)요, 차남(次男) 공원(恭源)은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칠원현감(漆原縣監)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赴任)하지 않고 증직(贈職)이 예조참판(禮曹叅判)이다. 아! 公은 평소(平素) 닦은바 강직(剛直)하고 조정(朝廷)에 나가서는 할말을 다하여 신하(臣下)된 직책(職責)을 완수(完遂)하고 착한 일을 들으면 목마른것 같이 좋아했으며 언제나 의리(義理)를 쫓았다. 百歲의 뒤에 누가 이 말을 듣고서 경의(敬意)를 표(表)하지 않으랴. 公의 세대(世代)가 이미 멀어졌으니 행적(行跡)의 전(傳)해짐은 10分之1, 2일 것이다. 그러나 만년(晩年)의 대절(大節)은 千질 높이 서서 가(可)히 생육신(生六臣)과 더불어 행열(行列)을 이루리라. 진실로 정(情)이 있는 者라면 어찌 그런 사적(事跡)을 없어지도록 그냥 두리오. 드디어 전(前)에 닦은 실마리로 인(因)하여 명(銘)을 지어 보건대 청송심가(靑松沈家)에는 영재(英才)가 보통(普通)을 뛰어넘어 도리(道理)로서 의지(意志)를 삼고 의리(義理)로서 몸을 보전(保全)하였네. 그의 지위(地位)는 비록 낮았으나 그 말은 반드시 펴내니 왕(王)이 가상(嘉尙)히 여기고는 세상(世上)에 드문 충신(忠臣)이라 했다. 이치(理致)는 소멸(消滅)과 생장(生長)이 있고 세상(世上)은 평지(平地)와 비탈이 있는데 지성(至誠)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충언(忠言)은 편벽되지 않았다. 아! 저 무리들이 간사하여 미친듯 일거일동 엿보았건만 萬번 죽어도 오직 곧은 마음 부끄러울것 없었다. 등용(登用)될 시점(時點)에 마침 위태로운 의심을 받았으니 넓고 넓은 우주(宇宙)에 내 몸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가을 강물엔 희미한 달빛이 옷깃을 비추는구나 궁벽한 산중(山中)으로 숨었으니 귀머거리 벙어리가 된 듯하여라. 한길되는 비석을 대면하니 萬번 갈아도 지워지지 않으리 나의 시(詩)는 公의 음덕(陰德)을 힘입어 百千年 오래가리. 戊辰年 여름 중순(中旬)에 세우다 通政大夫 前秘書院丞 安東 金寗漢 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