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공신도비명

안효사 동재와 서재


안효공 사당
소재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


안효공 신도비각


안효공 묘소 약도


안효공 신도비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府事兼領經筵書雲觀事靑川府院君安孝公溫神道碑銘竝書
公諱溫字仲玉姓沈氏靑松人鼻祖麗朝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子諱淵閤門祗侯子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於公爲祖考考諱德符位特進左侍中封靑城伯入我 朝辭勳不受諡定安妣淸州宋氏淸原君諱有忠女繼妣門氏監門衛郞將諱必大女公以洪武乙卯生門妣出也年十二中丙寅進士 太祖朝歷兵工曹議郞 恭靖卽位除保功將軍龍武司大護軍 太宗元年辛巳以本職知閤門事四年甲申以大護軍幹判內侍茶房事尋陞龍驤司上護軍兼判通禮門下事七年丁亥擢承政院同副代言陞左副尋陞嘉善拜左軍同知摠制八年戊子 世宗在潛邸擇名家令德以公長女配焉十一年辛卯陞嘉靖拜海豊道觀察使入爲叅知議政府事俄拜司憲府大司憲十四年甲午陞資憲拜刑曹判書漢城府判尹議政府叅贊左軍都摠制加正憲大夫吏曹判書十八年戊戌 世宗陞震儲八月 太宗禪位于 世宗尊爲 上王公以 國舅封靑川府院君 上王曰國君之舅其尊無比宜拜領議政其位次左右相議啓左相朴訔曰宜在昌寧府院君成石璘二公以謝恩使赴 京師 三殿各遣內侍餞于郊觀者傾都十一月公未及復 命姜尙仁事發初 上王旣禪位命軍國重事皆禀啓 上王兵曹只啓綽巡事餘悉不啓 上王震怒曰誰主爲此者 命禁府逮訊遂逮兵曹判書朴習叅判姜尙仁叅議李殼及諸郞官雜治不服 命釋之至是又以蜚語聞 上王復命鞠尙仁等壓膝四次尙仁不勝痛楚乃曰適遇同知摠制沈泟於宮門外泟謂臣曰內禁衛缺員甚夥侍衛虛疎盍及時塡補臣曰軍士如聚一處則豈虛疎之足憂乎泟曰聚一處則多少又奚可論乎泟卽公之弟也禁府逮泟 置對泟曰臣待罪內禁衛節制故興尙仁直議其侍衛虛疎耳一處云非臣言也尙仁又壓膝乃變其說曰不記日見領相溫於 上王殿門外言侍衛分屬兩處故甲士不足宜增爲三千溫以爲然後因事徃溫處又問曰軍士宜歸一處溫以爲然 上王曰果如吾所聞叅判趙末生等曰 二聖慈孝天至此輩欲易軍務其心難測也 上王命末生徃鞫尙仁曰直不勝苦毒耳其實皆誣也又鞫泟泟不勝杖又誣引公曰臣兄言軍士當歸一處 上王曰首謀者溫也 命召左相訔訔曰所謂一處云者豈指 上王殿耶必指 主上殿也卽請對盛言公貪權專利狀 上王默然良久曰人情孰不欲貪權左相此言今日不須發也又敎曰尙仁罪重宜置極刑習等視尙仁差輕姑留之以待溫還何如且溫何以處之或曰習等業就伏不可一日緩刑或曰習等已死溫誰從以辨誣不如留之以待其還訔曰溫所犯事證明白溫雖還更無可以對證者留之不可 上王用訔言誅習等於是柳廷顯末生等和附於訔或謂公當奔訴中 朝造變或謂公潛還本國而稱亂至設機西邊及公還到我境檻車致之公不知尙仁等已死求與對辨 上王命流水原府 賜後命曰尙仁等已死何從可辨卿 王妃父故只命賜死宜知予意以是年十二月二十五日遇禍壽僅四十四初 上王欲禪位而不顯言訔知之謂公曰近日 上旨公知之乎 上處事無有不善終必無患盖其意謂雖內禪可保其終無患也公以白 上上心不義訔而尤惡其與公言也卽以啓 上王曰訔非純臣也訔聞之懟公甚及公之死訔終始構陷尤力云公臨命戒家人曰吾子孫世世勿與朴氏相婚也噫嘻權壬旣逞于公又請廢 中宮 上王嚴辭斥之曰士庶出嫁無緣坐况 國母乎以故 坤位頼以安 上王敎曰此人誰不可禮葬葬禮不可不厚遣李陽卜葬地 命水原府庀葬事 賜棺槨石灰中貴人護喪所在官致祭葬龍仁山義谷負子之原 文宗元年辛未 敎政院若曰母后父當載 英陵碑文烏可無職名其令政府議 啓左議政皇甫仁右議政南智左贊成金宗瑞左叅贊安崇善右叅贊許詡等合辭 啓曰藉令所坐是實非謀反比况抑勤勘案使不得辨明國人皆寃之特 太宗嚴法以示人耳 世宗重違 父王處分未及伸白今宜還給職牒又 啓曰宋岳飛我 朝鄭夢周旣雪冤皆 贈諡 文宗並從之太常按諡法和好不爭曰安五宗安之曰孝 贈公諡安孝錄其兩子澮決並授敦寧主簿子濬先沒濬子湄授典農直長配三韓國大夫人順興安氏領敦寧府事昭懿公天保女逮公遭禍廷顯固請收孥夫人錄賤案其後右議政李稷等 啓曰恭妃殿下母儀一國而母安氏在賤案於國軆未安請削賤案還給職牒 世宗召知申事郭存中面諭曰予嘗侍坐 太宗 太妃曰恭妃母在賤案事甚不可 太宗曰予當改之未及施行遽爾賓天予知 父王意如此而時未施行故不敢開口近日言者多以爲言今大臣之言又如此其削賤案還給職牒並免其子女且母子不相見于今累年某日 恭妃當徃安氏第卿等知之云後以 世宗王后入於世室公之廟至今不祧官給祭需 國家哀榮之典至此而無餘憾矣夫人墓在安城郡東面加味屯坐壬之原公性仁厚慈順謙恭愛人與物無競及其戚聯 王家愈益歛遜 英廟在東宮也公白曰今之士大夫見臣皆致慇懃臣實懼焉要當杜門謝客以畢餘生其遠嫌畏愼如此而旣托跡肺腑與國同休戚義不可脫然引去則公於媢寵而工讒者何哉其亦順受其正而已矣噫自古君子之罹讒禍者或遭時孔艱或昧於炳幾雖其不幸亦有以致之而若公遇鴻昌之治抱明哲之智卒以不免此公之至冤也且當 世宗朝匹夫匹婦無冤而獨以公所處地嫌故不敢輕變 先朝事使公議抑鬱者數十餘年此公之至冤也然公之伸於天者遠矣公種德毓慶以錫其子孫奕錫蕃昌乃食其報生女而三登翟褘生男而六居台鼎上焉日月配明而陰敎彰下焉棟樑支厦而勳業爀沈氏之盛殆與 國祚而無彊夫以天道之悠遠仁慶之綿長而回示公議抑鬱之數十年直頃刻間爾公何冤之有撫徃跡而齎至慟者特子孫之私也公之沒距今三百餘載而墓道之顯樹闕焉雖以家經禍故事多湮晦而後裔之責在焉於是宗人共謀立石以檀屬尊年高托以滋筆不敢辭焉謹摭野史遺記槩述其被禍伸冤本末而公之立 朝德業槩夫人行懿失傳而未擧焉痛哉公三子六女女長 昭憲王后配 世宗母 文宗 世祖又有六大君兩公主子濬領中樞澮領議政諡恭肅公決領敦寧諡靖夷女姜碩德判書盧物載同中樞柳子偕知敦寧李崇之知中樞朴去疎知敦寧庶子長壽長己領中樞兩子湄監司淄判官恭肅三子潾叅議瀚左尹湲判官靖夷一子貞源水使碩德三子五女子希顔府尹希孟贊成希參婿南俊監察辛潚判事金元臣府使黃愼長源君朴楣叅議物載四子五女子懷愼府使曰愼判事思愼領議政好愼牧使婿鄭潔牧使丁湖右軍李宗衍僉正南倫宜寧君鄭溥子偕四子六女子均僉知壤牧使塾僉知塢監正婿成孝源主簿權瑊花山君柳壽昌判官崔曦僉正河澍佐郞鄭齊監察去疎三子三女子仲善平陽君季善監察叔善中樞婿禹敬宗李聞直長閔泮同知曾孫以後內外億麗不能盡記行郡守汾縣令淇副司勇洧縣監巚圻伯岱死節壬亂縣令大恒靑寧君大復司諫大孚叅判演關西伯澤掌令得元正郞游義湄之後也縣監泂修撰達源圻伯銓牧使友正圻伯友勝都正誢江都節死判書諿行判書詻佐郞譔應敎東龜承旨光洙副提學攸奉朝賀檀佐郞栢正言相監察橃司成枋承旨橕正(誤缺)得良正字得天佐郞均修撰聖希淄之後也郡守順路正言苓杭直疏遭乙巳禍府使荀司藝挺豪佐郞漢弼都事世遇正郞一羲潾之後也敦寧正順道舍人順門以直言被禍燕山時領議政連源同知敦寧逢源左議政通源靑陵府院君鋼誕生 仁順王后正字鍵左尹鐳判書忠謙領議政悅待敎忻左議政喜壽府使克明承旨彦明舍人光世靑雲君命世校理熙世靑城君廷和校理儒行府尹摠監司權府尹榥叅判枰統制使 判中樞梓叅議壽亮注書龜瑞判事最良監司仲良承旨季良 贈司書瀷應敎濡兵使澍靑恩府院君浩誕生 端懿王后大司憲珙縣監周觀行判書宅賢校理泰賢右議政壽賢持平 浸之後也縣監光宗典翰義欽司藝源海掌令源河正郞榰貞源之後也銘曰
木有連抱山必穹崇輔道碩德世必熙鴻於赫 英陵堯舜我 東孰爲夔龍繄維先公篤生 聖姙祐我周宗憑以日月契以雲風乃戚乃相翼于 兩宮愼謙諱盛鞠若無躬棐仁祐謙可質玄穹孰貝以錦孰貝以螮薰胥以織奇禍乃訌跼高蹐厚百世餘恫不沒者善不埋者忠鬱紆泉壤徯時以通天道好還有 命崇終以牒以牢節惠隨隆于滌其冤不顯其衷屈伸勝負理實不瞢直筆在史永示無窮
九世孫 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 檀 謹撰

심온선생묘

경기도기념물 제53호
소재지:경기도수원시팔달구이의동

심온(沈溫)(1375~1418) 선생은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문신으로 자(字)는 중옥(仲玉)이며 세종(世宗)의 부원군(府院君)이다.
고려말(高麗末) 11세때에 진사(進士)가 되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태조원년(太宗元年)(1392) 조선개국후에는 병조(兵曹), 공조의랑(工曹議郞)을 거쳐 태종(太宗)11년(1411)에 대사헌(大司憲]), 동왕(同王)14년(1414)에 호조(戶曹), 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지냈고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옥사가 일어나 의주(義州)에서 피체(被逮)되고 수원(水原)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문종(文宗)(1450~1452 재위)때 복관되었다. 시호(詩號)는 안효(安孝)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부사겸영경연서운관사청천부원군안효공온신도비명병서(번역문)
공의 휘는 온(溫)이요, 자는 중옥(仲玉)이며, 성은 심씨(沈氏)로 청송인(靑松人)이다.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의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衛尉寺)의 승(丞)을 역임(歷任)하신 휘(諱) 홍부(洪孚)인바 그의 아들(子) 휘 연(淵)은 합문(閤門)의 지후(祗侯)이며, 그 아들의 휘는 용(龍)으로 전리부(典理部)의 정랑(正郞)을 지냈는바, 후에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공의 조고(祖考)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덕부(德符)니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로 문하부(門下府)의 좌정승(左政丞)이었으며 청성백(靑城伯)에 봉작(封爵)되시었다. 조선건국(朝鮮建國)에 참여(參與)하지 않아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됨을 사양(辭讓)하고 받지 않았으며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다. 비(妣)는 청주 송씨(淸州宋氏)로 청원군 휘 유충(有忠)의 따님이고 계비(繼妃)는 인천 문씨(仁川門氏)로 감문위의 낭장(郞將)이신 휘 필대(必大)의 따님인바, 공은 고려 우왕(禑王) 원년(元年)인 을묘년(乙卯年:1375)에 문비(門妣)에게서 태어났다. 12세 때에 국자감(國字監)에서 시행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태조 때에 병조와 공조의 의랑(議郞)을 역임하고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보공장군(保功將軍)에 승진 용무사(龍武司) 대호군(大護軍)에 제수되었고 태종(太宗) 원년에 본직(本職)으로 지합문사(知閤門事)가 되었으며 태종 4년에는 대호군(大護軍)에 판내시다방사(判內侍茶房事)를 거쳐 용양사의 상호군(上護軍)에 승진하여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와 판문하사(判門下事)를 겸직하였다. 태종 7년에 승정원(承政院)의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拔擢)되었다가 좌부대언(左副代言)으로 승진되었고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임명되었다. 태종 8년에 세종(世宗)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명가(名家)에서 미덕(美德)을 겸비(兼備)한 규수(閨秀)를 택할 때에 공의 장녀(長女)가 간택(揀擇)되어 배위(配位)가 되었다. 태종 11년에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승진되어 풍해도(豊海道) 도관찰사(都觀察使)에 임용되었고 과만(瓜滿) 후에 돌아오자 참지의정부사(叅知議政府事)를 거쳐 사헌부(司憲府)의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태종 1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어서는 형조판서(刑曹判書)와 호조판서(戶曹判書)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의정부참찬(議政府叅贊)과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를 차례로 역임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진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되었다.
태종 18년에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있던 세종(世宗)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冊封)되고 八월에 태종(太宗)이 세종(世宗)에게 선위(禪位)하니 태종을 상왕(上王)으로 높이었다. 공께서는 국구(國舅)가 되심에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상왕(上王)이 하교(下敎)하기를,
『국구(國舅)는 높고 귀(貴)함이 비(比)할 데가 없는 바이니 마땅히 영의정(領議政)에 제수(除授)하되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의 위차(位次)는 의론해서 품계(稟啓)토록 하라.』
하니 좌상(左相) 박은(朴訔)이 아뢰기를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상석(上席)함이 마땅하다.』
함으로써 좌우상의 자리 바꿈이 이루어졌다.
공께서 사은사(謝恩使)로 연경(燕京:現 北京)을 향하여 갈 때에 상왕전(上王殿)과 금상전(今上殿:世宗)과 중전(中宮殿:王妃殿)에서 각각 내시(內侍)를 파견하여 교외(郊外)에서 전송(餞送)함에 그 행사(行事)를 구경하려는 한양시민이 도성(都城)을 비웠다. 11월에 공께서 환국(還國)하지 않은 때에 강상인(姜尙仁)의 상왕에 대한 불경사건(不敬事件)이 발생하였다.
상왕이 선위(禪位)할 때에 군국(軍國)의 중대사(重大事)는 모두 상왕에게 품계(稟啓)한 연후에 처리하도록 하명(下命)하였는데 병조(兵曹)에서는 단지 순찰업무(巡察業務)만을 상계(上啓)하고 여타군무(餘他軍務)에 대해서는 품계하지 않았던 고로 상왕이 진노(震怒)하여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금부(禁府)로 하여금 체포, 심문하여 가려내도록 명령하자 드디어 병조판서(兵曹判書) 박습(朴習), 참판(叅判) 강상인(姜尙仁), 참의(叅議) 이각(李殼)과 제랑관(諸郞官)을 모조리 체포하여 취조(取調)한 바, 고의(故意)가 아닌 단순한 사무착오로 판명되어 석방된 바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상왕에게 비어(蜚語)를 무고(誣告)한 바 있어 다시 국문(鞠問)하라고 명령되자 강상인(姜尙仁) 등을 네차례에 걸쳐 압슬형(壓膝刑)을 가했다. 상인이 아픔과 고초(苦楚)를 이겨내지 못하고 실토(實吐)하기를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을 궁문(宮門) 밖에서 만났을 적에 심정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내금위(內禁衛)에 군사의 결원이 심과(甚夥)해서 시위(侍衛)가 허소(虛疎)한 바이니 어찌 보진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臣)이 말하기를
『군사를 한 곳으로 모은다면 어찌 허소함을 우려(憂慮)하겠는가.』
한즉 심정이 말하기를
『한 곳으로 모은다면 그 다소(多少)를 어찌 논(論)하겠는가.』
라는 말은 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심정은 즉, 공의 아우이다. 의금부에서 심정을 체포하여 대질시킬 때 정이 말하기를
『신은 내금위에서 절제사(節制使)와 더불어 대죄(待罪)하고 있었습니다. 상인과 직접 의론한 것은 그 시위의 허소한 일뿐이지 명령이 한곳운운(一處云云)한 것은 신이 말한 바 없습니다.』
함으로 다시 상인에게 압슬형을 가하자 마침내 변설(變說)을 말하기를
어느날 영상(領相) 심온(沈溫)을 상왕전(上王殿) 문밖에서 만나 말하기를 시위(侍衛)가 양전(兩殿)으로 분속(分屬)된 고로 갑사(甲士)가 부족하니 마땅히 삼천명은 증원(增員)하여야 하겠다고 한즉 심온이 생각해 보자고 하여 후일에 그 일로 심영상 댁을 방문하여 또 묻기를,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귀결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더니 심온 또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라는 자백 사실들을 들은 상왕이 말하기를 과연 내가 들은 소문과 같다 하였다. 참판 조말생(叅判:趙末生) 등이 아뢰기를 두분 전하(殿下)의 자효(慈孝)가 하늘에 닿도록 지극하신 터에 이런 도배(徒輩)들이 군무를 바꾸고자 하는 그 심중(心中)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왕이 말생(末生)에게 명하여 강상인을 다시 국문(鞠問)하게 하였다. 상인이 말하기를 기왕에 자백한 바는 고문에 의한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한 말이고 그 실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여 또 심정을 국문하니 정이 매를 이기지 못하고 또 거짓으로 공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신(臣)의 형이 말하기를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귀결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수모자(首謀者)는 심온(沈溫)이다 하였다. 상왕이 좌상 박은(朴訔)을 명소(命召)하니 은(訔)이 말하기를 소위 한 곳이라 한 것은 상왕전(上王殿)을 가르킨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상전(主上殿)을 지칭한 것입니다. 즉시 대좌(對坐)를 청(請)하여 말을 들어봐도 공은 권세(權勢)를 탐내고 이익(利益)만을 마음대로 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하니 상왕이 오랜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잡으려는 욕심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좌상의 말은 오늘 더 하지 말라고 하며 하교 하기를 강상인의 죄는 중하니 마땅히 극형(極刑)에 처하고 박습(朴習) 등은 상인에 비하여 경(輕)하니 처리를 보류하고 기다렸다가 심온(沈溫)이 돌아온 후에 처결함이 어떠하며 온은 어떻게 처리함이 좋겠는가. 박습 등이 이미 죄를 자복하였으니 하루라도 형의 집행을 늦추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나 혹 말하는 사람이 박습 등이 이미 죽고 없으면 심온이 누구를 쫓아 그의 무고함을 변명하고 증명하겠는가? 환국할 때를 기다려 처리토록 보류함만 같지 못하리라 하니 은(訔)이 말하기를 심온의 범죄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立證)되었고 온이 비록 환국해도 대증(對證)할 자가 없사오니 보류함은 불가합니다 하니 상왕이 박은의 말을 받아들여 박습(朴習) 등을 주살(誅殺)하니 그 때에 유정현(柳廷顯)과 조말생(趙末生) 등이 박은의 말에 부화뢰동(附和雷同)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공께서 중국 조정에 사건을 조작(造作)하여 고변(告變)하고 억울하게 당한 사실을 분소(奔訴)한 후, 공이 본국에 잠입(潛入)하여 돌아와 서북도(西北道) 변방(邊方)에서 기회를 만들어 변란(變亂)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하여 공께서 우리 국경에 도착하자 체포되어 함거(檻車)로 압송(押送)되었다. 공께서는 강상인 등이 이미 사형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대변(對辨)을 요구하였으나 허사였다. 상왕의 명에 의하여 수원부(水原府)로 압송된 후 사약(賜藥)을 내리면서 가로되 강상인 등은 이미 처형되어 죽었으니 어찌 변명을 하겠는가?
『경(卿)은 왕비(王妃)의 아버지인 고로 다만 사사(賜死)하노니 나의 뜻을 알아 달라.』
함에 그 해 12월25일 경자일에 자진(自盡)의 화(禍)를 당하니 수령(壽齡)이 겨우 44세였다.
처음에 상왕께서 선위(禪位)하고저 마음을 가졌으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박은이 상왕의 뜻을 헤아려 깨닫고 공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상감의 뜻을 공은 알고 계시오? 상감께서 착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걱정이 없겠다 하니 대개 그 뜻이 비록 선위를 보류하여도 걱정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공께서는 이 이야기를 상감에게 알린 바, 상감께서는 박은의 의(義)롭지 못함을 느끼시고 박은이 공에게 한 말을 더욱 미워하여 즉시 상왕에게 상계(上啓)하기를 박은은 진실하지 못한 신하라고 아뢰었다. 박은이 이 말을 듣고 공을 원망(怨望)한 나머지 급기야 공에게 사사(賜死)의 화를 입게 하고 박은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모함하는 데 갖은 힘을 다 썼다고 한다.
공께서는 임종(臨終)하심에 가인(家人)에게 경계(警戒) 유언(遺言)하기를
『나의 자손은 대대로 박씨(朴氏)와 더불어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아아! 공께서 모든 권좌(權座)와 임무(任務)가 이미 끝나자 또 이번에는 공의 따님이신 중궁(中宮)의 폐출(廢黜)을 주청(主請)하고 나섰으나 상왕이 엄(嚴)히 물리치면서 말씀하시기를
『사서인(士庶人)도 출가(出嫁)하면은 법에 연좌됨이 없거늘 황차(況且) 국모(國母)에 있어서랴.』
하고 곤전(坤殿:中殿)에게는 안심하라고 간곡하게 일으셨다.
상왕께서 하교 하기를,
『심공은 비록 예장(禮葬)은 불가(不可)하나 장례(葬禮)는 불가불 후(厚)히 지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지관(地官) 이양(李陽)을 파견하여 장지(葬地)를 택(擇)하게 하고 수원부에 명하여 장사를 맡아 치루게 하였으며, 관곽(棺槨)과 석회(石灰)를 하사(下賜)하는 한편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호상(護喪)케 하였으며 용인현감(龍仁縣監)에게 치제(致祭)하게 하여 용인현산의곡(龍仁縣山義谷:舊龍仁郡 水枝面 二儀里 山義室:現 水原市 二儀洞 山義室)의 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
문종(文宗)께서 즉위(卽位) 후 신미(辛未:1451)년에 승정원(承政院)에 하교(下敎)하시기를 모후(母后)의 부친(父親)이 당연히 영릉(英陵) 비문(碑文)에 등재(登載)되어야 하겠는데 어찌 직명(職名)이 없이 등재 하겠는가 하시며 정부에 명하여 의론 결정하여 상계(上啓)하라 하시어 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 좌참찬(左叅贊) 안숭선(安崇善), 우참찬(右叅贊) 허허 등이 합의(合議)하여 상계(上啓)하기를 관계 기록에 의하면 연좌(連坐)로 명령된 바이나 그 사실에 있어서는 모반(謀反)이 아니었으며, 하물며 억압(抑壓)으로 사건을 마감하여 변명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국민이 모두 원통(冤痛)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태종께서 엄한 법도(法度)를 만백성에게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종께서도 부왕(父王)의 처분이 있기만을 미적미적 하시기를 여러 차례 미루시다 끝내 신원(伸冤)이 되지 못한 것이었으니 이제 신설(伸雪)하시고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하심이 마땅합니다. 또한 상계하기를 송(宋)나라 악비(岳飛)와 아조(我朝)에서 정몽주(鄭夢周)는 이미 설원(雪冤)이 되고 모두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이제 심온에게도 역시 시호를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문종께서는 두 가지를 모두 따르시고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시호를 짓게 하니 시법(諡法)에 화호부쟁왈안(和好不爭曰安)이오, 오종안지왈효(五宗安之曰孝)라는 법을 채택하여 공에게 시호를 안효(安孝)라고 내렸다.
공의 두 아드님인 회(澮)와 결(決)에게 함께 각기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를 제수(除授)하고 장자(長子) 준이 선몰(先沒)하여 준의 아들 미(湄)를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을 제수하였다.
배위(配位)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소의공(昭懿公)이신 이름 천보(天保)의 따님이신 바, 공께서 체포되시어 화를 입을 때에 유정현(柳廷顯)이 굳이 주청하여 종으로 거두어 부인을 천안(賤案:종의 문서)에 올려졌었는 바, 그 후 우의정(右議政) 이직(李稷) 등이 상계(上啓)하기를, 공비전하(恭妃殿下:昭憲王后의 初封職銜)의 모의(母儀)는 한 나라의 국모(國母)의 어머니인 안씨(安氏)가 천안(賤案)에 올려져 있음은 나라 체면(體面)에 미안한 일이오니 천안에서 삭제(削除)하고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할 것을 주청(奏請)함에 세종께서 도승지(都承旨) 곽존중(郭存中)을 부르시어 면유(面諭)하시기를,
『과인(寡人)이 일찍이 태종과 태비 양전(兩殿)을 모신 자리에서 태비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비(恭妃)의 어머니가 천안에 등재되어 있음은 심히 옳지 못한 일이 아니냐고 하시자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땅히 고치겠다고 하시고 미처 시행하시지 못하고 급하게 승하(昇遐)하셨으니 내가 부왕(父王)의 뜻이 이와 같으시되 특히 시행하지 못하시었음을 아는 고로 또한 상중(喪中)이라 감히 말도 꺼내지 못한 바이나 요즈음 말하는 사람이 많고 또한 대신(大臣)들의 주청(奏請)이 이와 같으니 그를 천안(賤案)에서 삭제(削除)하고 직첩(職牒)을 환급(還給)할지며 아울러 그의 자녀(子女)들도 면천(免賤)케 하라. 또한 모자(母子) 간에 서로 만나지 못함이 여러 해가 지났으니 모일(某日)에 공비(恭妃)를 안씨댁(安氏宅)에 가시게 할 것이니 경등(卿等)은 그리 알라 하셨다.
후에 세종과 왕후께서는 종묘(宗廟)의 세실(世室)에 들으시고 공의 사당(祠堂)은 지금까지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은전(恩典)을 받아 제수(祭需)가 관급(官給)되고 있으며, 국가에서 슬픔과 광영(光榮)의 은전(恩典)이 이에 이르니 감개(感慨)하여 마지 않는 바이며, 삼한국대부인의 묘소는 안성군 동면 가미둔(安城郡 東面 嘉美屯:現 安城郡 金光面 五興里 安室陵)의 임좌원(壬坐原)이다.
공은 성품(性品)이 인후(仁厚)하시고 자순(慈順)하시며 겸공(謙恭)하시고 애인(愛人)하시며 물욕(物慾)이 없으셨고 왕가(王家)와 척연(戚聯)이 맺어진 후로 왕가가 더욱 번성(繁盛)하였으나 공께서는 더욱 겸손(謙遜)하셨다. 세종께서 동궁(東宮)으로 계실 때에 공께서 동궁에게 말씀하시기를 요즈음의 사대부(士大夫)들의 신(臣)을 보는 태도가 모두 겸손하고 정중하니 신은 실로 두렵기 그지 없으며, 마땅히 두문(杜門)하고 사객(謝客)하며 여생(餘生)을 마쳤으면 합니다 하시었다. 그 원혐(遠嫌)하고 외신(畏愼)하심이 이와 같았고 이미 왕실과 가까운 친족이 되었음에 국가와 더불어 기쁜 일이고 슬픈 일을 같이하여 의리상 가히 벗어날 수 없으니 공께서 그들의 아첨(阿諂)하고 참소(讒訴)하는 것을 어찌하실꼬? 그 또한 정직(正直)함을 순수(順受)할 뿐이라!
슬프다! 자고(自古)로 군자(君子)가 참소(讒訴)를 당하고 화(禍)를 입는 것은 혹 어지러운 때를 만나거나 위험한 때에 비록 그러한 불행을 당하는 일이 있지만 공 같으신 분은 좋은 세상을 만나시고 명철(明哲)하신 지혜(智慧)를 가지시고도 마침내 면(免)치 못하셨으니 이것이 공의 지극한 원한(冤恨)이다. 또한 세종조(世宗朝) 때는 한 사람도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없었는데 홀로 공만이 혐의(嫌疑)스런 처지에 몰려 감히 전조(前朝:太宗朝)의 처사를 경솔(輕率)하게 변경(變更)하지 못하다가 공의(公議)로 억울(抑鬱)하게 되신 지 수십여 년이니 이 또한 지극한 원한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하늘의 뜻에 의하여 설원(雪冤)하신 지 오랜 지라 공께서 덕(德)을 닦고 경사를 나아서 그 자손에게 끼치심이 빛나고 번창(蕃昌)하여 이의 보답(報答)을 받아서 따님이 세분이나 왕후가 되셨고 남자 중에서는 여섯분이나 정승(政丞)에 오르시니, 위로는 일월과 같이 밝아 왕비의 교훈이 빛나고 아래로는 동량(棟樑)이 집을 바쳐서 훈업이 빛나니 심문(沈門)의 번성(蕃盛)함이 자못 나라의 운수와 더불어 가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의 유원(悠遠)함과 인경(仁慶)의 면장(綿長)함으로 돌이켜 보건대 공께서 억울한 일을 당하신 수십 년의 기간이 실로 잠깐의 동안이니 공께서 무슨 원한이 있으시리오? 지나간 사적(事蹟)을 더듬어서 몹시 원통(至慟)한 것은 특히 그 자손들의 마음이다.
공께서 몰(歿)하신 지 거금(距今) 삼백여 년이나 되는데 묘비를 세우지 못한 지라 비록 집안의 화(禍)를 거친 탓으로 인함이며 그 사이 서적이 많이 인멸(湮滅)하였으니 이는 후손들의 책임이 크다. 이에 종인(宗人)들이 비(碑)를 세우기로 의논하고 단(檀)이 항렬(行列)이 높고 연령이 많다 하여 비문을 부탁함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야사(野史)와 유기(遺記)를 수집하여 대강 그 피화(被禍) 사실과 신원(伸冤) 본말(本末)을 기술(記述)함에 공의 조정(朝廷)에서의 덕업(德業)과 부인의 행적(行蹟)을 모두 실전(失傳)하여 다 기록하지 못하니 통탄(痛歎)할 일이다.
공께서는 3남6녀를 두셨으니 장녀(長女)는 소헌왕후(昭憲王后)로서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배위(配位)이시고 문종(文宗)과 세조(世祖)의 모후(母后)이시며 또한 육대군(六大君)과 두공주(二公主)를 두셨다. 장자(長子) 준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요, 차자(次子) 회(澮)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시호(諡號)가 공숙(恭肅)이고, 삼자(3子) 결(決)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시호는 정이(靖夷)이며, 사위(女壻) 강석덕(姜碩德)은 판서(判書)이다. 노물재(盧物載)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며 류자해(柳子楷)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이고 이숭지(李崇之)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며 박거소(朴去疎)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이고 서자(庶子)에 장수(長壽)와 장기(長己)가 있다.
영중추공(領中樞公)은 2남(2男)을 두셨으니 미(湄)는 참의(叅議)요, 치(淄)는 판관(判官)이며, 공숙공(恭肅公)은 삼자를 두셨으니 린(潾)은 참의(叅議)요, 한(瀚)은 좌윤(左尹)이고, 원(湲)은 판관(判官)이며, 정이공(靖夷公)은 일자를 두셨으니 정원(貞源)으로 수사(水使)다.
석덕(碩德)은 3남5녀를 두었으니 아들 희안(希顔)은 부윤(府尹)이요, 희맹(希孟)은 찬성(贊成)이고, 희삼(希參)이다. 사위(壻) 남준(南俊)은 감찰(監察)이요, 신숙(辛潚)은 판사(判事)며 김원신(金元臣)은 부사(府使)요, 황신은 장원군(長源君)이며 박미(朴楣)는 참의(叅議)다. 물재(物載)는 四남五녀를 두었으니 아들 회신은 부사(府使)요, 유신(由愼)은 판사(判事)이며, 사신(思愼)은 영의정(領議政)이고, 호신(好愼)은 목사(牧使)이다. 사위 정결(鄭潔)은 목사(牧使)요, 정호(丁湖)는 우군(右軍)이고, 이종연(李宗衍)은 첨정(僉正)이며, 남륜(南倫)은 의령군(宜寧君)이고, 정부(鄭溥)이다. 자해(子偕)는 4남6녀를 두었으니 아들 균(均)은 첨지(僉知)요, 양(壤)은 목사(牧使)이고, 숙(塾)은 첨지(僉知)이며, 오(塢)는 감정(監正)이다. 사위 성효원(成孝源)은 주부(主簿)요, 정감(鄭瑊)은 화산군(花山君)이고, 유수창(柳壽昌)은 판관(判官)이며, 최희(崔曦)는 첨정(僉正)이요, 하주(河澍)는 좌랑(佐郞)이고, 정제(鄭齊)는 감찰(監察)이다. 거소(去疎)는 3남3녀를 두었으니 아들 중선(仲善)은 평양군(平陽君)이요, 계선(季善)은 감찰(監察)이고, 숙선(叔善)은 중추(中樞)이다. 사위 우경종(禹敬宗)이요 이문(李聞)은 직장(直長)이요, 민반(閔泮)은 동지(同知)이다. 증손(曾孫) 현손(玄孫) 이후의 내외 후손은 수가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경기 감사(畿伯) 대(岱)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절(殉節)하신 분과, 사간(司諫) 대부(大孚)와, 참판 연(演)과, 평안감사(箕伯) 택(澤)과, 장령(掌令) 득원(得元)과, 좌랑(佐郞) 유의(游義)는 미(湄)의 손(孫)이다.
정언(正言) 영(苓)은 올바른 상소를 올린 것이 화가 되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당하신 분이고, 부사(府使) 순(荀)과 사예(司藝) 정호(挺豪)와 좌랑(佐郞) 한필(漢弼)과 도사(都事) 세우(世遇)와 정랑(正郞) 일희(一羲)는 린(潾)의 후손이다.
원(湲)은 3남을 두었으니 돈녕정(敦寧正) 순도(順道)와 우윤(右尹) 순경(順徑)과 사인(舍人) 순문(順門)으로 연산조(燕山朝)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입은 분이며, 사인(舍人)은 四남을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영의정(領議政) 연원(連源)과 차남(次男)은 수찬(修撰) 달원(達源)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이고, 차남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봉원(逢源)과 차남 좌의정(左議政) 통원(通源)이다.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鋼)은 인순왕후(仁順王后)를 탄생(誕生)하셨고 대사헌(大司憲) 의겸(義謙)과 판서 충겸(忠謙)과, 대교(待敎) 흔(忻)과 영의정(領議政) 열(悅)과 사인(舍人) 광세(光世)와 청성군(靑城君) 정화(廷和)와 청운군(靑雲君) 명세(命世)와 교리(校理) 희세(熙世)와 부윤(府尹) 총(摠)과 부윤(府尹) 황(榥)과 참판(叅判) 평(枰)과 감사(監司) 권(權)과 권(權)의 손자인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호(浩)는 단의왕후(端懿王后)를 탄생(誕生)하셨고, 참의(叅議) 수량(壽亮)과 주서(注書) 구서(龜瑞)와 응교(應敎) 유(濡)와 병사(兵使) 주(澍)와 증사서(贈司書) 익(瀷)과 대사헌(大司憲) 공(珙)과 우의정(右議政) 수현(壽賢)과 행판서(行判書) 택현(宅賢)과 교리(校理) 태현(泰賢)과 지평(持平) 육(錥)은 모두 연원(連源)의 후손(後孫)이다.
경기 감사(畿伯) 전(銓)과 목사(牧使) 우정(友正)과 경기 감사(畿伯) 우승(友勝)과 도정(都正) 현은 병자호란(丙子胡亂)에 강화(江都)에서 순절(殉節)한 분과 판서(判書) 집(諿)과 행판서(行判書) 액(詻)과 좌랑(佐郞) 선(譔)과 응교(應敎) 동구(東龜)와 승지(承旨) 광수(光洙)와 지평(持平) 세탁(世鐸)과 감사(監司) 세정(世鼎)과 부제학(副提學) 유(攸)와 좌랑(佐郞) 백(栢)과 헌납(獻納) 사홍(思泓)과 정언(正言) 상(相)과 감사(監司) 벌(橃)과 봉조하(奉朝賀) 단(檀)과 사성(司成) 방(枋)과 승지(承旨) 탱(橕)과 정(正) 득량(得良)과 정자(正字) 득천(得天)과 좌랑(佐郞) 균(均)과 수찬(修撰) 성희(聖希)는 모두 달원(達源)의 후손(後孫)이다.
정자(正字) 건(鍵)과 좌의정(左議政) 희수(喜壽)와 교리(校理) 유행(儒行)과 판중추(判中樞) 재(梓)와 통제사(統制使) 박(樸)과 판결사(判決事) 최량(最良)과 감사(監司) 중량(仲良)과 승지(承旨) 계량(季良)과 현감(縣監) 주관(周觀)은 모두 봉원(逢源)의 후손(後孫)이다.
우윤(右尹) 뢰(鐳)와 부사(府使) 극명(克明)과 승지(承旨) 언명(彦明)은 모두 통원(通源)의 후손(後孫)이다.
전한(典翰) 의흠(義欽)과 사예(司藝) 원해(遠海)와 장령(掌令) 원하(源河)와 정랑(正郞) 지(榰)는 모두 정원(貞源)의 후손(後孫)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木有連抱(목유연포) 나무는 아름드리의 큰나무가 있고
 山必穹崇(산필궁숭) 산은 반드시 높고 높도다.
 輔有碩德(보유석덕) 왕정을 보필함을 덕으로 함에
 世必熙鴻(세필희홍) 세상이 크게 태평하였도다.
 於赫英陵(어혁영릉) 빛나도다 세종대왕이시어
 堯舜我東(요순아동) 동방의 요순이로다.
 孰爲夔龍(숙위기룡) 그 누가 기·룡인고
 繄維先公(예유선공) 오직 공이시었다.
 篤生聖姙(독생성임) 임사(妊姒)같으신 왕후를 낳으시어
 祐我周宗(우아주종) 주(周)나라 문왕(文王) 같으신 우리 성군(聖君)을 도우시다.
 憑以日月(빙이일월) 일월에 비기시고
 契以雲風(계이운풍) 풍운으로 합하도다.
 乃戚乃相(내척내상) 국구도 되시고 정승도 되시어
 翼于兩宮(익우양궁) 양궁의 날개가 되시도다.
 愼嫌諱盛(신혐휘성) 혐의를 삼가고 꺼리기를 다하여
 鞠若無躬(국약무궁) 몸 바쳐 진충하였도다.
 棐仁祐謙(비인우겸) 어짐과 겸손을 도웁고 도와
 可責玄穹(가책현궁) 하늘에 스스로를 책망하도다.
 孰貝以錦(숙패이금) 누가 고운 비단이고
 孰螮以蝀(숙체이동) 누가 무지개인가
 薰胥以織(훈서이직) 궁형(宮刑)을 당하도록 죄를 만들어
 奇禍乃訌(기화내홍) 의외의 불행을 입으셨도다.
 跼高蹐厚(국고척후) 몹시 두렵고 몸둘 곳을 모르게
 百世餘恫(백세여통) 백대가 지나도록 슬픔은 남으리라.
 不沒者善(불몰자선) 몰하지 않는 것이 선이오
 不埋者忠(불매자충) 묻히지 않는 것이 충이로다.
 鬱紆泉壤(울우천양) 한이 구천(九泉)에 얽힘에
 徯時以通(혜시이통) 때를 기다려서 뚫리도다.
 天道好還(천도호환) 천도가 좋게 돌아와서
 有命崇終(유명숭종) 운명하신 것을 왕명으로 높히시도다.
 以牒以牢(이첩이뇌) 직첩을 돌려주시고 또한 치제하시고
 節惠隨隆(절혜수융) 시호(諡號)를 내리시어
 于滌其冤(우척기원) 그 원통함을 씻으니
 不顯其衷(불현기충) 그 충성이 빛나도다.
 屈伸勝負(굴신승부) 굽히고 펴고 이기고 지는 것이
 理實不瞢(이실불몽) 이치가 실로 어둡지 않도다.
 直筆在史(직필재사) 공의 사적이 역사에 직필되어 있으니
 永示無窮(영시무궁) 길이길이 끝이 없게 빛나리라.

 9세손 보국숭록대부판중추부사 단이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