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주사공(휘 계년)행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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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강진최씨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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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치동 용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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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成州事公諱繼年行蹟
五世祖 지성주사공(知成州事公)의 휘(諱)는 계년(繼年)이고 字는 서일(瑞日)이며 號는 둔재(遁齋)이니 청성백(靑城伯)의 3男으로 初娶配位上黨(현재의 청주) 송씨(宋氏)의 소생이시다. 公의 생졸년대와 행적(行蹟)이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모두 실전(失傳)되었기 때문에 자세한 행적은 알 길이 없으나 대강 그 일부를 소개(紹介)하고자 하는 바이다. 지성주사공은 고려말에 개경(開京)의 청문동(靑門洞)에서 출생(出生)하셨다. 그 年代를 추고(推考)해 보건대 청성백이 1328年 충숙왕(忠肅王)15年 무진에 출생하였으며 公의 이복(異腹)아우인 안효공(安孝公)이 1375年 우왕(禑王)1年 을묘생이며 公의 아들 애암(愛菴)공 휘 연(涓)이 1392年(이태조1) 임신생이었던 점등(點等)으로 미루어 보아 애암공이 출생하였을 적의 지성주사공(知成州事公)의 연치(年齒)를 25歲 가량으로 추정(推定)해 본다면 1368年인 공민왕(恭愍王)17年 무신이 되는 바이다. 公께서는 개성에서 성장하였으며 학업(學業)은 고려말의 대학자(大學者)이었던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운곡선생께서는 정계가 혼미(昏迷)해지고 권신(權臣)들이 사리사욕만을 일삼아 부정부패(不正腐敗)가 극을 치닫고 있으며 이성계(李成桂) 일당의 처사(處事)가 심상치 않음을 간파(看破)한지라 난세(亂世)에서 벼슬할 것을 단념하고 고향인 원주(原州)로 내려가서 치악산(雉岳山) 비로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각림사동구(覺林寺洞口)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후진을 교육(敎育)시키는데 뜻을 두고 사랑방에다 서당(書堂)을 차려놓고 숙식을 제공하면서 모여드는 학동(學童)들을 가르칠 적에 선생(先生)의 고매(高邁)한 인격과 심오(深奧)한 학문실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지라 명문대가(名門大家)집 자제(子弟)들이 많이 모여와서 수학(修學)하였다. 후일에 태종대왕(太宗大王)이 된 이방원(李芳遠)도 소년시절에 글재주가 있고 영민하여 형제간중(兄弟間中)에서 제일 기대(期待)를 걸고 있던 당시에 상만호직(上萬戶職)에 있었던 이성계(李成桂)도 방원(芳遠)에게 공부를 훌륭히 시켜 장차 대성(大成)시켜보려는 생각으로 운곡문하(耘谷門下)로 보내어 수학시킨 결과 17歲되던 봄에 국자감병과(國子監丙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이방원 역시(亦是) 1367年生이었으므로 지성주사공과는 동갑(同甲)나기거나 한 두살의 선후배(先後輩)의 입장에서 동문수학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선생은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개국후 이방원이 세자책봉(世子冊封)되면서 고명(高名)하신 元선생을 정승(政丞)으로 뫼시고저 수차 특사를 파송(派送)하여 간청(懇請)하여 보았으나 매번 거절당한 고로 자신이 직접 각림사(覺林寺)로 거동하여 뫼시고 오고자 하였는데 시종(始終) 피신(避身)해 버리고 상면(相面)조차 거부하며 끝내 높은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았다 한다. 지성주사공(知成州事公)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1384年 의흥위(義興衛)의 산원(散員)에 임명되어 불과(不過) 17세의 나이에 무관(武官)에 투신하였다. 다음 해인 禑王11年 4月에는 청성백이 문하부찬성사(門下府贊成事)로 재임중에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가 되어 現 함흥지방인 함주(咸州), 北靑州 홍원일대(洪源一帶)에 전함(戰艦) 150척으로 편성된 왜적(倭賊)이 침공하여온 것을 토벌차 출정(出征)하였을 적에 상원수(上元帥)의 부관(副官)인 별장(別將)밑에서 보조역할로 아버지의 시종을 들며 종군하였는데 왜구(倭寇)가 각지에 상륙하여 양탈(攘奪)을 감행하고 있는지라 퇴로를 차단하고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면서 토문(兎門)동의 온전 요충지대(要衝地帶)로 몰아부쳐 대적(大敵)을 완전(完全) 섬멸(殲滅)시키는 대전과를 거두고 그해 9月에 개선(凱旋)하여 전투에 많은 체험을 쌓았다. 그해 10月에 청성백(靑城伯)은 조경사(朝京使)로 명(明)나라 남경(南京)에 갔을적에 장장 2만리 왕복길을 육로(陸路)로 갔었으며 세공물(歲貢物)의 호송명목으로 조경사(朝京使)의 시종역(侍從役)을 하기 위하여 배종(陪從)하였다가 원만이 용무를 마치고 다음해 3月에 귀환(歸還)하였다. 청성백(靑城伯)은 환국(還國)직후 작년의 동북면(東北面) 토왜(討倭)에서 세운 전공(戰功)에 의하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는 영광이 베풀어졌으며 公은 별장(別將:正7品)에 승진되었다. 1387年 2月에 동북면의 북청주와 단천일대(端川一帶)의 개마고지(蓋馬高地)에 오랑캐 여진족(汝眞族)의 괴수(魁首)인 목아단도당(木兒丹徒黨)이 침공하여 와서 약탈 살상 납치 등의 만행을 감행한다는 장계(狀啓)에 따라 청성백이 동북면 상원수로 出征하였을 때 낭장(郞將)으로 승격되는 동시 종군(從軍)하여서는 목아단도당을 섬멸하는데 대전과를 올렸으며 개선하여서는 청성백이 서북면 도원수(都元帥)에 제수(除授)되었을 적에 동북면의 목아단토벌전공(木兒丹討伐戰功)으로 중랑장(中郞將)에 승차되었다. 1388年(禑王14) 무진에 있었던 소위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 사건때에는 청성백이 서해도(西海道) 도원수(都元帥)로 재임중에 右軍 도원수에 제수되어 출전하였던고로 그 막하(幕下) 중랑장(中郞將)으로 종군하였다가 리성계(李成桂)의 회군제의에 동조 회군후에는 폐우 입창(廢禑立昌)이 되고 조정이 개편될 때에 공은 평안도(平安道)의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에 제수되었는바 품계(品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 正3品이었다. 성주(成州)는 현재의 평안남도 성천군(成川郡)으로 대동강(大同江) 상류에 위치하여 동북쪽은 맹산군(孟山郡)과 양덕군(陽德郡)에 인접하고 서북쪽은 순천군(順川郡) 서편은 강동군(江東郡) 동편은 곡산군(谷山郡) 南쪽은 대동강(大同江) 지류인 南江을 건너 황해도 수안군(遂安郡)에 인접하였으며 언진산맥(彦眞山脈)의 여맥(餘脈)이 파급되어 구릉(丘陵)의 기복이 심하고 비류강(沸流江) 유역에 다소간의 분지(盆地)가 형성되고 있으되 넓지도 못하고 수리시설이 좋지 못하여 밭이 많은 고장이라 한다. 연혁(沿革)은 비류왕(沸流王)의 송양고도(松讓故都)라 하며 고구려의 始祖 동명왕(東明王)이 북부여(北扶餘)로 부터 졸본천(卒本川)에 내도(來都)하여 송양(松讓)을 그 나라에 내림으로서 다물도(多勿都)를 두어 송양에 封하여 다물후(多勿侯)를 삼았다 하며 고려태조14年(950)에 강덕진(剛德鎭)을 두었고 顯宗九年(1018)에 성주방어사(成州防禦使)를 두었다가 그후에 지성주군사로 개정했으며 이씨조선에 와서는 태종15年(1414)에 성천(成川) 도호부(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世祖때에는 성천진(成川鎭)을 두어 덕천, 개천, 자산, 순천, 상원등의 오개군(五個郡)과 양덕, 맹산, 삼등, 강동, 은산등 5縣을 관할(管轄)케 하여 오다가 1895年에 분할되어 성천군(成川郡)으로 개편(改編)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주(成州)는 서북면을 방어(防禦)하는 중요한 요새(要塞)인 동시에 西京인 平壤의 외곽 요충이기도한 바 약관(弱冠)시절에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의 중책을 제수받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첫째로 건장하고 풍모 또한 걸출하였으며 문필(文筆)과 무술(武術)이 겸전(兼全)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략과 전술에도 능하였고 위엄이 있어 수령(守令)의 자질이 풍부하였다. 1392年 7月17日에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이씨조선을 창건하자 조정에서는 각도 수령방백(守令方伯)에게 통달하기를 각기 그 직위에 유임된 것으로 알고 직무에 충실할지며 동요치 말라는 엄명이 내렸으나 公은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선생으로 부터 철저하게 배운 유교사상(儒敎思想)에 의하여 군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철학적인 가르침을 실천할 결심으로 成川邑의 뒷산에 올라가서 고려왕조의 망(亡)함을 슬피 통곡한 뒤에 관직을 폐리(廢履)와 같이 버리고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음거해 버렸다. 청성백(靑城伯)은 1392年 3月중 수시중(守侍中)으로 재임중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이 이방원에 의하여 살해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입장에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임한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물러 앉졌다가 이성계 일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피부로 느낀 나머지 1392年 5月末日자로 공양왕(恭讓王)에게 사전(辭箋)을 제출하고 사저에서 시서(詩書)를 즐기면서 한일월(閒日月)하는 동안 7月17日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이씨조선이 창건되었다. 익년(翌年) 10月에 청성백의 6男 종(淙)이 이태조의 둘째 따님 경선옹주(慶善翁主)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니 동시에 청원군(靑原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청성백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제수(除授)되어 한양 천도(漢陽遷都)에 수반(隨伴)되는 신도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 造成都監)의 도제조(都提調)로서 총치(總治)의 임무를 수행중이었으며 조정에서 청성백의 3男 계년(繼年)이 현덕(賢德)하고 문필이 뛰어남을 알고 기용(起用)코저 여러차례 소명(召命) 하였으나 公은 두 조정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절에서 관직에 뜻이 없었던 고로 회피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가 필경에는 벽지에 피신둔거(避身遁居)키로 결심하고 지리에 밝은 북청(北靑)으로 단신 피해서 음거(陰居)하였다. 그러나 정종(定宗)때에 이르러 방원(芳遠)이 세자가 된 후 인재를 널리 구하던 중 문득 옛날 동문학(同門學)인 인물중 문무겸전(文武兼全)하고 지략이 뛰어난 계년(繼年)이 기억에 떠올라서 불렀으나 이미 수년전부터 행적이 묘연하다는 전갈을 받은 세자 방원(世子芳遠)은 전국 수령방백에게 전지(傳旨)하여 방(榜)을 붙이게 하여 발견되는대로 압송토록함에 따라 북청주상만호(北靑州上萬戶)에 발각되어 개경으로 압송되었다. 결국 정종대왕으로부터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니 심중에는 전혀 뜻이 없으되 어명을 거역하다가는 당장 왕명 불복종의 제목으로 곤장을 맞든지 낙도로 유배될 것이 뻔한고로 일단 직첩을 받아 가진후 나주로 부임할 적에 개경(開京)에 있는 가대(家垈)를 처분하고 가솔(家率)들과 가산을 개경근방의 벽난(碧欄)나루터에서 선박에 실고 서해를 거쳐 전라도 목포에 이르러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서는 영산포에서 하선치 않고 곧장 상류인 임곡(林谷)에 이르러 가족과 가산을 내려 놓은 다음 진원현(珍原縣)으로 지금의 장성군 남면 마령리 산중에 옮겨 놓았다. 마령리(馬嶺里) 선평(船坪)마을이 비산비야(非山非野)로 인심이 순후(淳厚)하여 가히 정착 둔거(遁居)할만한 곳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호를 둔재(遁齋)라 일컬으며 생활기반을 닦아 놓은 다음에는 경기도 안성으로 올라와서 할아버지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의 산소 근처에 있는 실왕사(實旺寺)에 들려서 삭발하고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하고 승명(僧名)을 도생(道生)이라 행세함으로써 완전히 속세를 떠나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려조에 대하여는 만고의 충신열사로서의 지조를 지키었고 이씨조정에 대하여 반역자가 되었으나 끝내 무난히 몸을 숨겨 좌정승으로 계시었던 아버지 청성백(靑城伯)에게나 형제간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公은 현명한 처사를 하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연(涓)이 차차 장성하자 훈계(訓戒)하기를 『나는 도의(道義)가 허물어져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을 천고의 수치로 알고 멀리 했으나 여(汝)는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가업을 보존토록 하라』함으로서 아들인 애암공(愛庵公)은 명심하고 면공(勉工)하여 一四一四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양명(揚名)의 길을 열었다. 1418년 봄에 연천(漣川) 청성백 내외분의 산소에 사초(莎草)를 드리고 석물(石物)을 모실적에 안효공의 둘째 서랑(婿郞) 강석덕(姜碩德)씨가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시절에 청성백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지성주사공은 묘지명(墓地銘)을 써서 상석밑에 매예(埋瘞)해드렸는데 그때에도 도생(道生)이라 표시하였다 한다. 1418年8八月10日에 太宗이 世宗에게 선위(禪位)함으로서 태종은 상왕이 되어 군사에 관한 사항만은 장악하고 있었는바 당시 병조판서 박습(朴習) 참의 강상인(姜尙仁)등의 상왕에 대한 불경(不敬)사건이 발생 확대되어 무술옥사(戊戌獄事)가 터졌을 적에 公의 막내아우로 중군동지총제겸내금위절제사(中軍同知摠制兼內禁衛節制使)직에 있던 〈泟〉이 이 옥사에 주모급으로 몰려 처형될 적에 공인 형제간인 관계상 연좌(連坐)되어 가지고 실왕사에서 체포 압송되었다가 11月26日에 승명(僧名) 도생의 이름으로 옹진으로 유배되었으나 동복형제(同腹兄弟)간이 아니라 하여 한등을 감해서 속천(屬賤)되는 일은 없이 양인(良人)으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420年(세종2) 봄에 전국적 대 한발이 계속되므로서 발수기(發穗期)의 보리가 고사(枯死)하고 신곡을 파종할 수 없게 되어 인심이 흉흉하여지자 억울한 형률(刑律)에 백성들의 원한이 서려 있다 하여 4月3日에 대사령(大赦令)이 공포되기를 『원지에 유배된 자는 그가 원하는 곳의 외방(外方)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는 영이 내림에 따라 공은 가솔들이 거주하고 있는 진원현(珍原縣)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주군 소재 용진산(湧珍山)에 있는 용진사(湧珍寺)를 부처지로 정하고 수도하다가 1422年(세종4) 五月10日에 신원(伸冤)되어 자유로운 몸이 된 후로는 실왕사(實旺寺)로 다시 올라 와서 있던중 1434年(세종16) 11月5日 작고(作故)하였다. 조정에서는 문부(聞訃)하시고 도생은 중전(中殿)의 숙부인 고로 미두(米豆) 共히 30石과 백지 100권을 하사(下賜)하셨으며 소헌왕후(昭憲王后)께서는 구저(舊邸)에서 자당(慈堂)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를 모시고 잔치를 베풀어 드리고저 친정 안식구들이 모였다가 부음(訃音)을 듣고 조의(弔意)를 표하고 해산하였으며 중전께서는 내섬시(內贍寺)로 하여금 이미 사사로이 제사를 행하였다. 그해 12月8日 세종대왕께서는 영의정 황희(黃喜)등에게 의논하시기를 『지난번(1434年 갑인4四月18日)에 부윤(府尹) 심징(沈澄)이 작고시에는 중궁(中宮)이 내섬시(內贍寺)로 하여금 치제(致祭)했는데 지금 중도생이 죽어서 중궁(中宮)이 이미 사사로운 제사는 행하였으나 예에 의한 치제(致祭)는 궐하였으니 심징(沈澄)의 예(例)에 의하여 치제하여야 할 것인가. 이미 道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치제하지 말게 할 것인가』 물으시니 황희(黃喜)등이 아뢰기를 『부모를 이별하고 사랑을 베어버려 이미 道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반드시 치제할 겄입니까』 하므로서 치제치는 않았다. 公의 묘소(墓所)는 나주 용진산 남쪽의 여황백석계동후산(余皇百石溪洞後山) 중턱에 자좌로 모셨으나 토적곽헌(土賊郭憲)의 난때에 비갈(碑碣)이 없어지고 소몽자손(所蒙子孫)이 원지(遠地)에 거주하는 관계로 실전되었다가 1730年(영조6) 경술에 심득(尋得)하고 이래(爾來) 향사를 받들고 있다. 1834年에 장성군 남면 마령리에다 향유(鄕儒)들이 양계사(良溪祠)를 창건하고 청성백 지성주사공 애암공(愛菴公) 三賢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춘추향사를 봉행타가 1868年(고종5) 무진에 대원군(大院君)에 의하여 전국 서원사우(書院祠宇)가 훼철(毁撤)될 당시 양계사 역시 훼철(毁撤)되고 말았는데 그후 1881年(고종18)에 사림(士林)들의 잇따른 서원사우의 복설(復設)을 윤허(允許)하여 주시라는 상소에 의하여 복설은 불가하나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토록 하라는 전지(傳旨)에 따라 전라도관찰사 이서구(全羅道觀察使 李書九)의 찬(撰)으로 된 단비(壇碑)를 사지(祠趾)에 설치하고 이래단향(爾來壇享)을 받들어 향화(香火)가 끊기지 않다가 해방후 유림(儒林)들이 복원하여 받들어 오고 있다. 公의 행장(行狀)은 대사헌 양응정(梁應鼎)께서 찬(撰)하였으며 배위(配位)는 강진최씨(康津崔氏)인 바 장성군 남면 마령리 와곡 서편의 큰 능선경좌인데 이 역시 실전되었다가 1857年 정사에야 방손(傍孫)인 경택(敬澤)씨가 진원현감(珍原縣監)으로 재임중 산송(山訟)에 승소(勝訴)하여 찾게 되었다 한다. 아들은 단지 한 분으로 휘(諱)는 연(涓)이요 호는 애암(愛菴)인바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었다. 前 大宗會 副會長 相得 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