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공신도비명 |
신도비각 |
소재지: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 |
岳隱公諱元符神道碑銘
自古國家革命必有秉節守義之臣顧念所事而不忍忽忘或死或隱惟適之安是乃所以立命天地而維持綱常之重者也雖其所處之有不同而所傳之或詳或略究厥所致不可不謂同一揆則名之可言何必以差殊觀也粤若高麗之末杜門節義之多且盛爲歷代之所罕有而岳隱先生沈公寔居其一是其世顯王朝位致宰輔其兄靑城伯定安公佐命新朝勒銘鍾彛勢威方隆苟使勉循所命參諸同列以效其才略事業之數光輝之發自應不待他求而足也乃超然獨行自甘隱淪以遂素志而略無係戀其殆所謂求仁得仁又何怨者不亦庶幾乎流亞也歟當其時有趙松山狷以平壤伯浚之弟棄家入山不應徵召先生其亦與之同操者歟是固尙論之所不容遺也謹按公諱元符其稱岳隱取義松岳之隱也其曾祖諱洪孚在麗朝忠烈王時官至衛尉寺丞而封君靑己卽靑松之舊號後遂爲貫祖諱淵官閤門祗侯考諱龍官典理正郞追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以靑城伯德符之貴而推恩也妣金氏貫系未詳其生公亦未詳何年公生而稟質粹美聰慧絶倫其在髫齔與群兒嬉戱有把鏡仰天謂天有二日者卽取鏡反視對曰是乃天日之照上下天光耳天豈有二日乎長者傍觀咸嗟異其有造非常稍長上學讀史至王蠋事捲卷歎曰有臣如此齊亡奈何其於不事二君之義夙有所欽聳者矣出而從師益齋李文忠公與圃隱鄭文忠公爲誼交所講質者帥是道也及聞圃隱聘价中國還遇海颱畿危僅免則馳書賀之以爲斯文之幸其推重如此其登仕在 恭愍王朝屢遷至典理判書而中間敭歷多不可考辛亥遭母夫人喪居憂盡禮後仍不復出盖見麗運之將訖而知其非力可挽廻故也至其竟値淪喪自厲罔僕與同朝舊僚約會于不朝峴其言志有願爲王蠋之語時則圃隱已致命善竹橋而 恭讓王且退位矣 太祖旣定鼎撫摩舊臣親臨試士于敬德宮前而懷義之士無一人至者言志會罷卽掛冠逾峴而去其峴之名不朝以是也亦曰掛冠峴其於將去賦詩有于嗟入杜門之句此則杜門洞之所以名而同隱者多至七十二人始公離家屬其子曰我之生死汝不可知須以今去爲死日可也其行也與其姑夫閔農隱安富有詩相酬曰魯連何日踏東海殷聖當年採首山故國惟餘山海在吾儕堪愧住人間觀於此可以知其自處之決矣然而一入杜門行蹟無見金火之際史多闕文揣想臆斷懼非傳信傳疑之道故索言之有所不敢也遠至宣祖追闡前朝忠賢命建祠杜門洞立碑不朝峴而碑面高麗忠臣不朝峴七字乃御題也爰曁 英祖又命立杜門洞碑而駐蹕不朝峴其於峴於洞各有賦詩命從臣是載特差開城留守致祭於祠而公皆與褒奬夫豈無所以哉吁亦韙矣公之配位姓氏亦未詳三子長天潤令同正次天柱縣令次天湜天潤男孝尙孝叅判勳封靑川君自郡事天柱男世叔判官世龍世弼世基世材牧使天湜男溶海曾玄以下一依譜列其諸後孫世居貫邑之靑松亦多分播嶺下諸郡竝各以文物著聞間嘗集議以爲公之卒遠在杜門洞而墓所不可明的可且設壇舊鄕以共歲薦而隨復樹神道碑于壇側後孫相縉摭述公遺事而其族之在海外者爲之出資助役其在宜寧者名相碩以其宗門諸公意來責余所刻之文以余忝在外裔誼不敢自外然顧此卑微微廢其何以堪之抑公之高義貞節可與牧冶諸賢共傳而恨不得一大信筆以公諸世其於今日尙復何言哉姑此掇纂如右而重爲詞以附之 詞曰 撐天拄地 君爲臣綱 有臣有君 不貳其方 死生隱顯 惟義是視 西登東踏 振古有幾 聚我先生 允迪平斯 不朝我志 杜門我歸 紆靑施紫 匪無先後 太虛浮雲 於我何有 群奔競逐 彼哉何爲 我則有志 千古在玆 後凋維松 崧高維岳 仰詹廻顧 淸風可掬 時有升降 理則不遷 頑廉懦立 嶙不竦然 孰徵杞宋 孰采乘 來者其補 文獻之齾 爰立豊碑 故山之陲 大者旣擧 其細可推 松山不褰 松水方至 尙俾行過 指點興哨 外 裔 孫 聞韶后人 金 榥 謹撰 慶州后人 崔秉瓚 謹書 後 孫 沈載鎬 謹篆 악은공휘원부신도비명(번역문) 옛부터 국가혁명(國家革命)에는 반드시 병절수의(秉節守義:절개와 의리를 지킴)한 신하가 있나니 그 사적을 돌이켜 생각하면 차마 홀연히 잊지 못하며 혹은 죽고 혹은 은둔하는 등 오직 적절히 취하는 것을 마음 편안히 여겼으니 이것이 천명(天命)을 좇아 마음을 편안히 하는 일이고 강상(綱常:인간이 행해야 하는 도덕(道德)을 유지하는 중요한 일이다. 비록 그 처소는 같지 않으나 전해진 바로는 혹은 자상하고 혹은 간략하게 그 소치(所致)를 구명(究明)해 보건대 동일하게 통한 바라고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므로 이름지어 이를만하니 하필 별다르게 보리오. 고려말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킨 분이 많고 성대(盛大)하였으니 역대에 드문 일이었는데 악은 선생 심공(沈公)은 그들 중에 한 분이시다. 이분은 대대로 조정에 이름이 나고 직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다. 그의 형인 청성백 정안공은 새 왕조를 보좌하여 공적이 컸으므로 그 이름이 종묘에 있는 종에 새겨졌다. 위세가 융성해짐에 진실로 소명(召命)을 힘써 따르고 정사에 참여하여 그 재략(才略)을 발휘하니 업적이 넓어지고 명성이 발휘되어 자동적으로 다른 데 구하지 않아도 족하였다. 공은 초연히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스스로 은둔생활을 달게 여기어 평소의 뜻을 이루고 조금도 미련을 두지 않으셨다. 소위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는데 가까워졌으니 무엇을 원망하리오. 또한 동류(同流)에 가까운 것 아니랴. 그때를 당하여 송산(松山:諱는 趙狷)이 평양백(平壤伯:諱는 趙浚)의 아우인데 가정을 버리고 입산하여(새조정의) 부름에 불응하였으며 공도 또한 더불어 지조를 같이한 분이니 이는 실로 높이 평가하는데 빠져서는 안될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원부(元符)요, 호는 악은(岳隱)이라 함은 송악(松岳)의 은자(隱者)라 하여 그 뜻을 취한 것이다. 증조의 휘는 홍부(洪孚)이니 고려조 충렬왕(忠烈王) 때 관직이 위위승(衛尉丞)에 이르고 청기군(靑己君)에 봉하니 청기(靑己)는 청송의 옛날 칭호로서 훗날 드디어 본관(本貫)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연(淵)이니 관직은 합문지후(閤門祗侯)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龍)이니 관직은 전리정랑(典理正郞)이고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추증된바 청성백(靑城伯:휘는 德符)의 귀(貴)로 인하여 추존(追尊)된 것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인데 본관과 계보는 미상(未詳)이며 공을 어느 해에 낳은지도 미상이다. 공은 출생하면서 성품이 아름다웠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을 넘었다. 그가 어렸을 때 여러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다른 아이가 거울을 쥐고 하늘을 보고는 하늘에 두개의 해가 있다고 말하니 즉시 거울을 취하여 비추어 보고는 대답하기를 『이는 하늘의 해가 여기에 비추어 두개로 보이는 것이지 어찌 하늘에 두개의 해가 있느냐.』 고 말했다. 어른들이 곁에서 보고는 모두 감탄하며 깊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기이하게 여겼다. 점점 장성하여 배움에 역사책을 읽다가 왕촉(王蠋:중국의 忠臣)의 행실을 보고는 책을 덮어놓고 감탄하면서 신하가 이와 같았는데 제(齊)나라가 망함이 웬일이냐고 말했으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義理)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흠모(欽慕)하였다. 익재(益齋:文忠公:휘는 李齊賢) 선생에게 나가서 스승으로 섬기고 포은(圃隱:文忠公:휘는 鄭夢周)과 더불어 정분있게 사귀며 학문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도리(道理)를 따랐다. 포은(圃隱)이 중국에 사신으로 나갔다. 환국할 때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신을 보내 위문을 하며 유학(儒學)의 다행이라고 했으니 높이 받들어 귀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그분이 벼슬에 오른 것은 공민왕(恭愍王) 시대이며 자주 자리를 옮겨 전리판서(典理判書:長官級)에 이르렀다. 중간의 혁혁한 사적(事蹟)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신해년(辛亥年:서기 1371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복상중에는 예법을 모두 좇아 문밖에도 나오지 않았으니 대개 고려조(高麗朝)의 운이 다 된 것을 짐작하고 힘으로는 만회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고려조가 망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새조정의 신하 노릇을 않겠다고 뜻을 같이한 동료와 더불어 부조현(不朝峴)에 모여서 맹서하여 약속을 하였다. 공이 뜻을 말할 적에 왕촉(王蠋:中國의 忠臣)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 때는 포은(圃隱:諱는 鄭夢周)이 이미 선죽교(善竹橋)에서 생명을 잃었으며 공양왕(恭讓王)도 벌써 왕위에서 물러났었다. 이태조(李太祖)가 이미 왕위(王位)를 정하고는 고려조의 구신(舊臣)들을 무마하고자 경덕궁(敬德宮)에 친히 참석하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였는데 의사(義士)들은 한사람도 나온 자가 없었다. 언지회(言志會:자기의 뜻을 말하는 모임)가 파하고 관(冠)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고개를 넘어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그 고개의 이름을 부조현(不朝峴)이라 하였음은 이 때문이며 또한 괘관현(掛冠峴)이라고도 한다. 그 때 떠나기 전에 남긴 시(詩)에 두문(杜門)에 들어간다는 구절(句節)이 있어 두문동(杜門洞)이란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함께 숨어 들어간 자가 많아 72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공이 집을 떠날 때 아들들에게 분부하기를, 『나의 생사는 너희들은 알지 못할 것이니 모름지기 떠나간 날을 망일(亡日)로 삼음이 옳을 것이라.』 고 말씀하셨다. 공이 떠날 적에는 고모부인 농은(農隱:諱는 閔安富)과 함께 떠났으며 시(詩)를 주고 받은 것이 있는데 「노중련(魯仲連:中國 齊나라의 용기있는 웅변가)은 언제 동해를 밟았을까. 은(殷)나라 성인 백이숙제(伯夷叔齊)는 당년에 수양산의 고사리를 꺾어 먹었지. 우리 나라에도 산과 바다가 있는데 우리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로다.」라고 읊었다. 이를 보면 공이 스스로 결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두문동에 들어가신 후로는 행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혁명(革命)의 시기였기에 역사책에도 빠진 글귀가 많아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추상적으로 단정함은 진실을 전하는 도리가 아니어서 두렵기만 하고 찾아내어 말하고자 해도 감히 못하는 바가 있다. 선조대왕(宣祖大王) 때에 이르러 전왕조의 충신명현(忠臣名賢)을 앞으로 분명히 드러나게 하고 두문동(杜門洞)에 사당(祠堂)을 건립하라고 명령하고 부조현(不朝峴)에 비석을 세워 「고려충신 부조현(高麗忠臣 不朝峴)」이란 일곱자를 새기니 이는 왕이 직접 쓴 것이다. 영조(英祖)가 또다시 두문동에 비석을 세우라 명하고 부조현에서 임금도 수레를 잠시 멈추었고 현(峴)과 동(洞)에 대해 각각 시를 짓게 하였으며 동행한 신하에게 이를 이어서 기록케 하고 특별히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차출하여 사당에서 제(祭)를 올리도록 하였다. 공이 함께 포상을 받았으니 어찌 그 원인이 없겠는가. 아! 또한 장한 일이로다. 공의 배위는 성씨도 알 수 없으며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천윤(天潤)이니 관직이 영동정(令同正)이고 차남은 천주(天柱)니 관직이 현령(懸令)이며 다음은 천식(天湜)이다. 영동정공(令同正公:天潤)의 아들은 효상(孝尙)이 있고 효연은 참판(叅判)으로 공훈을 세워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지고 자연(自 )은 군사(郡事)를 지냈다. 현령공(縣令公:天柱)의 아들 세권(世權)은 판관(判官)이고 세필(世弼), 세기(世基)가 있으며 세재(世材)는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천식(天湜)의 아들은 용(溶)과 해(海)이며 증손 현손 이하는 족보에 기록된 대로이다. 공의 모든 후손들은 대대로 본관인 청송에 거주하고 또한 영남(嶺南)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퍼졌으며 아울러 각기 문물(文物)로서 이름을 떨쳤다. 일찍이 회의를 열고 의논하기를 공께서 돌아가신 지 오래되고 멀리 두문동(杜門洞)이나 묘소(墓所)도 찾을 수 없으니 옛고향에 설단(設壇)하여 제향을 받드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합의하고 아울러 신도비(神道碑)를 단 옆에 세우기로 하였다. 후손 상진(相縉)이 공의 유사(遺事)를 간추려 저술하였으며 종족(宗族) 가운데 해외에 있는 분도 출자(出資)하고 조역(助役)하였다. 의령(宜寧)에 사는 상석(相碩)이 종문(宗門) 여러분의 의사에 따라 찾아와 나에게 비문을 지으라 하니 내가 외손으로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미약하고 연로하여 어찌 감당할지 걱정이었다. 공이 지킨 높은 의리와 정절은 가히 목은(牧隱:諱는 李穡), 야은(冶隱:諱는 吉再)과 더불어 함께 전해질 것이다. 다만 공의 생존시의 커다란 신필(信筆:믿을 수 있는 증빙서류)을 얻지 못하니 한스러운 일이며 오늘날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이에 위와 같이 찬(撰)하고 거듭하여 운문(韻文)을 지어 첨가한다. 천지간에는 인군이 신하의 벼리가 된다. 신하 있고 인군 있음은 그 길을 의심할 수 없다. 사생 은현에서 오직 의리만을 보았다. 동서의 갈림길에 옛 도리를 지킨 자 몇 명인가. 우리 선생님은 여기 통달하셨다. 부조(不朝)가 나의 뜻이요, 두문이 나의 갈 곳이라. 높은 관직에 오름이 전후에 없는 것 아니다. 허공에 뜬 구름 나에게 무슨 소용이며 무리지어 달리고 다투어 쫓아도 저 사람이 어찌할 것인가. 나는 곧은 뜻 있어 천고(千古)토록 여기에 있으리. 추운 후 생생한 저 소나무 높음이 송악이로다. 우러러 보고 돌아보니 청풍을 손에 넣을 만하다. 시대는 오르내려도 이치는 변천하지 않는다. 깡패가 청렴해지고 나약자가 서게 되니 그 누가 공경 않으랴. 누가 기나라 송나라를 증험하며 누가 역사를 채택하리오. 장래 문헌의 흠결점을 보충할 것이로다. 이에 풍성한 비(碑)를 고향산 모퉁이에 세운다. 큰 것은 이미 들었으니 그 상세한 것은 미루어 알 것이다. 송산은 이즈러지지 않고 송수는 흘러갈 것이다. 지나가는 자로 하여금 보고 읽어 감흥되기를 바라노라. 외손 문소후인 金榥 근찬 경주후인 崔秉瓚 근서 후손 沈載鎬 근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