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백행장 |
特進輔國崇祿大夫靑城伯沈公行狀
公諱德符字得之世家慶尙靑鳧縣有文林郞衛尉丞洪孚生閤門祗侯淵淵生吏曹正郞龍公其子也行年十七忠穆王元年甲申以門蔭授左右衛錄事叅軍恭愍王八年戊戌陞爲中郞將兼閤門引進副使壬寅陞奉善大夫閤門副使癸卯遷奉常大夫典工摠郞是年授中顯大夫少府尹甲辰乞水原府使廉使行郡公將入見見使不裩便退使命吏讓之對以服不如儀使謝其耿介不阿若此丙午拜江華府尹是郡僻陋未嘗講學公旣至大開黌舍迎致師伎集鄕子弟敎以詩書禮義蔚有文翁化蜀之風辛亥以通憲出剌忠州吏治民寬考居第一尋丁大夫人憂徒步奔安城哀毁過禮幾至失性癸丑遂服拜正順大夫判衛尉寺事僞朝二年乙卯陞爲右常侍以公多智畧才堪將帥陞爲奉翊大夫禮儀判書充江界都萬戶敷施雄畧名聲益彰升聞于朝擢爲奉翊大夫密直副使義州副元帥丙辰除密直副使上護軍未幾徵還丁巳除同知密直司使上護軍是年爲西海道副元帥兼都巡問使戊午除密直司使僞朝錄其功賜推誠協贊之號尋遷密直司使上護軍十月奉使如京時 太祖高皇帝屢問孫內侍不復使者皆力辭公受命无難色旣至闕下專對敏給公在京師授匡靖大夫密直司使己未還國拜知門下事上護軍是年拜知門下事商議會議都監事上護軍庚申倭寇以戰艦千艘侵我南鄙所過殘滅靡遺諸將皆不能禦轉鬪至龍安鎭浦其勢甚張僞主命公將樓舡四十徃討之賊方舟而陣鋒鏑磨戞聲振天地公畧无惧色一擧盡殲自是倭寇不復跳梁壬戌爲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尹完葺城堡功旣訖甲子以判開城府事徵還乙丑陞爲門下叅贊東北面有倭警公受節鉞討之以門下贊成事朝京師丙寅還國封靑城府院君戊辰之役公從我太祖師次婆娑府 太祖唱義旋師公協贊翊戴居多恭讓元年己巳陞爲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都統使旣登宰輔常戒幹僕曰我朝夕在公凡書問副以物者汝毋受諸子有除授輒示其手足皸瘃因戒之曰我出入勤勞方能臻此汝曺何能坐致爵位庚午中飛語謫兎山縣事遂暴白未幾徵還辛未起爲左侍中從恭讓子奭朝京師壬申我 太祖踐阼追賞回軍諸將公功第一授判門下追封靑城伯甲戌城松都公董治之是年作新邑于漢陽命公摠治其事於是量期程計徒庸曉之以義使之以寬民不病焉丁丑除判門下戊寅拜領三司己卯改左政丞庚辰以疾辭復封靑城伯食以一品祿辛巳正月某甲卒于第享年七十四訃聞 太宗輟朝三日遣中使賜祭賻有加 命有司以禮葬于麻田縣贈諡定安公禀性仁恕恬靜喜慍不形居處恭无妾媵不務生産取與以義由是爲將相二十年庫无餘財廩无餘粟及卒僅備喪祭其居官也遇事剛果畧無私阿其攻敵也旣得其魁未嘗妄殺其燕閑也對卷蕭然如文人雅士初娶淸原君宋有忠女先公終生三男仁鳳義龜道生生學浮屠法爲沙門後娶監門衛郞將仁川門必大女生四子澄溫淙 溫丙寅科進士淙尙 太祖第二女慶善公主我 殿下在潛邸 太宗選溫第一女作配旣 卽位冊爲 恭妃此其終始哀榮之大槩今玆太史氏編修實錄以沈氏諸子皆幼而予贅於其家徵公行狀當公之卒也必有以文鳴世者著其行述重遭家難不知落在何所碩德惧公之崇功偉烈將淪沒无傳綴拾素聞聊述萬一以進朝奉大夫漢城少尹姜碩德狀 특진보국숭록대부청성백심공행장(번역문) 공의 휘는 덕부(德符)요 자는 득지(得之)이며 세가(世家:王族名族에 대한 기록)는 경상도 청부현(靑鳧縣)에서 문림랑위위승(文林郞衛尉丞) 홍부(洪孚)가 합문지후(閤門祗侯) 연(淵)을 나았고 연이 이조정랑 용(龍)을 나았으니 공은 그의 아들이다. 나이 17세되던 해 충목왕원년 갑신에 문음(門蔭)으로 좌우위녹사참군(左右衛錄事叅軍)에 제수(除授)되었고 공민왕八년 무술에 중랑장 겸 합문(中郞將 兼 閤門)에 승진되어 부사(副使)에 등용되었다. 임인에 봉선대부합문부사(奉善大夫閤門副使)에 올랐고 계묘에 봉상대부전공총랑(奉常大夫典工摠郞)으로 옮겼다가 이 해에 중현대부소부윤(中顯大夫少府尹)에 임명되었다. 갑진에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원하여 나가니 암행어사가 고을에 와서 공이 들어가 보니 어사가 그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잠방이같은 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바로 물러나왔다. 그러자 어사가 아전에게 명하여 그를 꾸짖으니 옷이 의식(儀式)에 맞지 아니하여 그랬다고 대답하자 어사가 사과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병오년에 강화부윤이 되니 이 고을은 원래 궁벽하고 미개하여 일찍이 학문을 가르치지 못하였다. 공이 부임하여 서당(書堂)을 크게 개설하고 스승을 맞아들여 고을의 자제(子弟)를 모아 시서(詩書)와 예의(禮儀)를 가르쳐서 울연(蔚然)히 문옹(文翁:漢나라 舒의 사람 어려서부터 好學하여 春秋에 精通하였다. 景帝末에 蜀의 郡守가 되어 백성을 敎化시켰다)이 촉나라를 교화시킨 풍도(風度)가 있었다. 신해에 통헌(通憲)으로 충주목사에 나아가 아전을 잘 다스리고 백성에게 너그럽게 하니 치적(治績)이 제일이었다. 조금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도보(徒步)로 안성까지 와서 너무 슬퍼하여 거의 실성(失性)할 지경에 이르렀다. 계축에 복을 벗고 정순대부판위위시사(正順大夫判衛尉寺事)에 임명되었다. 신우(辛禑) 二년 을묘에 우상시(右常侍)에 올랐다. 공은 지략(智略)이 많았고 재주는 장수(將帥)가 될만하여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에 승진되었고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에 보충(補充)되니 시정(施政)에 큰 계략(計略)을 써서 명성을 더욱 날리니 조정에서 봉익대부밀직부사 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로 발탁하였다. 병진에 밀직부사 상호군으로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나라에서 불러 정사에 동지밀직사사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이 해에 서해도부원수(西海道副元帥) 겸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으며 무오에 밀직사사가 되니 신우의 조정에서 추성협찬공신(推誠協贊功臣)에 책록(策錄)하였고 조금 있다가 밀직사사 상호군으로 옮겼다. 十월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국의 연경(燕京)에 갔을 때에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가 여러번 안부를 손내시(孫內侍)에게 묻고 심부름꾼을 보내지 않은 것은 공이 굳이 사양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은 명을 받음이 어렵지 않고 궐하(闕下)에 이르러 묻는 즉시 재치있게 대답하니 공이 연경에 있을 때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에 임명되었고 귀국하여 지문하사(知門下事) 상호군에 임명되었다가 이 해에 지문하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를 배수(拜受)하였다. 경신에 왜적(倭賊)이 전함(戰艦) 천소(千艘)로 우리나라의 남쪽 변방을 침략하여 지나는 곳마다 싹쓸어 남는것이 없었으나 여러 장수가 막지 못하여 용안진포(龍安鎭浦)로 공격하여 들어오니 그 형세가 너무 컸다. 신우가 공에게 명하여 높고 큰 배 四十을 가지고 가서 토벌하니 적은 배를 서로 붙들어매어 진(陣)을 치고 창과 화살촉 부딛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공이 지략(智略)으로 두려운 빛 없이 일거(一擧)에 모두 섬멸하니 이로부터 왜적이 다시는 함부로 날뛰지 못하였다. 임술에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겸 평양윤(平壤尹)이 되어 성 바깥 둘레의 흙담을 완전히 고쳐 쌓고 일이 끝나자 갑자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을축에 문하참찬(門下叅贊)에 승진되었다. 동북면에 왜적이 침범하여 들어오자 공이 절월(節鉞:조선시대 관찰사 유수등이 부임할 때 왕이 내주던 手旗와 도끼같이 만든 것으로 생살권을 상징함)을 받고 토벌하였으며 문하찬성사로서 연경에 갔다가 병인에 돌아와서 청성부원군에 봉하여졌고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할 때 우리 태조가 파사부(婆娑府:遼東都指揮使司)에 있는 府의 이름)에서 창의(唱義)하여 군사를 돌리는데 공의 협찬하고 도운 공이 많았다. 공양왕원년 기사에 문하좌시중 경기좌우도 도통사가 되었고 이미 재상(宰相)에 올라 항상 여러 아들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조석으로 공무에 있으면서 글을 써서 묻고 물건으로 돕는 것은 너희들에게 벼슬이 내리더라도 받지 말라는 것이다 하고 그 손과 발의 살결이 트고 동상(凍傷) 입은것을 보이며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데 수고로움이 이와 같으니 너희들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벼슬을 할려고 하느냐 하였다. 경오년에 뜬 소문으로 토산현(兎山縣)에 귀양갔다가 일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얼마 안되어 풀려나와 신미에 좌시중이 되어 공양왕의 아들 석(奭)을 따라 연경에 다녀왔다. 임신년 우리 태조가 등극하자 회군할 때의 공훈이 여러 장수중 제일이어서 추상(追賞)을 받고 판문하(判門下)에 임명되고 청성백에 추봉(追封)되었다. 갑술에 송도(松都:개성)에 성을 쌓으는데 공사를 감독하였고 이 해에 한양에 새 도읍을 만드는데 공에게 명하여 그 일을 다 다스리게 하니 이에 공사의 공정(工程)과 기한을 헤아려 의(義)로써 알아듣게 타이르고 너그럽게 일을 시키니 백성이 괴로워하지 아니하였다. 정축에 판문하에 임명되고 무인에 영삼사(領三司)가 되었으며 기묘에 좌정승이 되었고 경진에 병으로 사직하니 다시 청성백에 봉하고 일품록(一品祿)을 받았다. 신사정월 모갑(某甲)에 집에서 졸하니 향년이 74요 부음(訃音)이 들리자 태종이 조회(朝會)를 사흘동안 폐지하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며 부조를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마전현(麻田縣)에 예장(禮葬)하니 시호는 정안(定安)이다. 공은 품성(禀性)이 인서염정(仁恕恬靜:인자하고 관대하며 편안하고 고요함)하며 기쁜 것과 성내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거처함에 공손하며 첩부(妾婦)가 없고 재산 늘리는데는 힘쓰지 않으며 가짐과 줌을 의리로 하였으니 장수와 정승을 20년동안 하였으나 창고에는 남은 재산과 곡식이 없고 임종에 겨우 상제(喪祭)에 쓰는 것만 있었다. 벼슬에 있어서는 일에 강직하여 조금도 사사롭고 아첨함이 없었고 적을 공격함에 그 괴수를 잡았어도 일찍이 망령되이 죽이지 않으며 그 한가할 때는 책을 대하여 조용하니 문인(文人)과 아담한 선비 같았다. 초취(初娶)는 청원군(淸原君) 송유충(宋有忠)의 여(女)로 공보다 먼저 돌아갔고 三남을 나았으니 인봉(仁鳳) 의구(義龜) 도생(道生)인데 도생은 불교를 배워 중이 되었다. 후취(後娶)는 감문위랑장(監門衛郞將) 인천문필대(仁川門必大)의 여로 아들 넷을 나았으니 징(澄) 온(溫) 종(淙) 정(泟)이다. 온은 병인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종은 태조의 제2녀 경선공주(慶善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전하(殿下)가 임금이 되기전에 태종이 온의 제一녀를 배위로 골라서 즉위(卽位)하자 공비(恭妃)로 삼으니 이것이 그 시종(始終)의 슬픈 일과 영화로운 일의 대략이다. 지금 사관(史官)이 실록(實錄)을 편수(編修)하는데 심씨의 모든 아들이 어림으로 내가 그 집에서 공의 행장으로 증거가 될만한 것을 모으니 공의 임종(臨終)에 반드시 글로써 세상에 알려질만한 것이 있었을 터인데 그 행적(行蹟)을 지은 것이 집안의 화난(禍難)을 만나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석덕이 공의 높고 위대한 공렬(功烈)이 장차 없어져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본래 들어서 아는 것을 주어 모아 만분의 일이라도 지어서 올린다. 조봉대부한성소윤 강석덕(姜碩德)이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