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백신도비명


개수 신도비


청성백 신도비


배위 묘표석


묘표석



입구표석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산 110


四世祖 輔國崇祿大夫靑城伯諱德符神道碑銘竝書
公諱德符字得之靑松人有諱洪孚仕高麗爲文林郞實公曾祖是生閤門祗侯諱淵實祖是生吏曹正郞諱龍實考公始以父任授左右衛叅軍歷事忠穆恭愍累轉閤門副使典工摠郞出補水原江華忠州咸有治績丁內艱哀毁過禮僞辛襲位以公有將帥才擢拜禮儀判書充江界都萬戶俄以密直副使歷任西海道副元帥前後三鎭聲名益彰錄其功賜推誠協贊之號尋遷密直司使奉命朝 大明專對敏給還拜知門下事倭寇千艘侵我南鄙所過殘暴諸將皆莫能禦公徃討盡殲自是不復跳梁累轉西北面都巡問使判開城府事門下叅贊東北有倭警受節鉞擊却之封靑城府院君攻遼之後我 太祖倡義旋師公協贊居多陞左侍中京畿都統使俄中飛語謫兎山縣事竟白徵還爲左侍中我 太祖卽祚追賞回軍功封靑城伯城松都作新邑皆 命公摠治役一踰時而民不病焉由判門下領三司改左政丞以疾辭竟卒于第春秋七十四訃 聞輟朝賜祭賻有加禮葬于麻田縣公禀性仁恕恬靜不形喜慍不務生産爲將相二十年家無餘資凡書問副以物者戒門絶之諸子除官輙出手足示其皸瘃曰我出入勤勞方能臻此汝曺何以坐享爵位乎居官剛果而無私阿臨陣戮魁而不妄殺其燕閑常對書卷蕭然若儒者然初娶靑原君宋有忠女生三子仁鳳都摠制義龜判事繼年牧使後娶監門郞將門必大女生四子澄府尹溫領議政淙靑原君尙慶善公主 同知摠制澄之子孫相繼簪纓而最達者光彦登文魁爲右叅贊 英廟選溫女冊爲妃實 昭憲王后后之弟澮領議政靑松府院君澮子湲贈左贊成生二子順徑捷武科封靑城君順門中文科 贈領議政生四子連源領議政靑川府院君達源贈吏曹叅判逢源同副承旨通源右議政皆文科也靑川之子鋼領敦寧靑陵府院君卽今 王妃父叅判之子銓捷文科爲全州府尹右議政之子鐳中武科爲節度使又如 章敬王后聖烈仁明大王大妃恭懿王大妃皆異姓後裔及他滿朝貴顯者不可殫錄豈非公積德之餘慶哉公卒之後遭家屯難神道無碑叅贊君慨然唱之內外雲仍咸喜響應遂擇幹能者鎭鎬嶐掌其事俾通源銘之辭不獲已畧叙其梗槩云銘曰
沈家靑鳧世積厥德文林吏郞飛不振翼惟公是承聲其器識歷試中外荐陟大職島夷跳梁長驅無忌公膺司命殲彼醜類鴨綠回師雖由 聖智倉卒決策實資協議天啓景運遂擢中台調梅未久卜阡斯催岷江有源其流不竭嶠塗曁莘咸出聖哲豈若一門誕降三 后前沒鼎軸况多其胄臨湍有墳久闕頌辭叅贊慨然始斲新碑墓道之榮克全于玆白石巍巍澄波泱泱卓哉勳業百代是揚
五代孫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通源 撰

4세조 보국숭록대부청성백휘덕부신도비명(번역문)
공의 휘는 덕부(德符)요, 자는 득지(得之)니 청송 사람이다. 휘 홍부(洪孚)라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조에 벼슬하여 문림랑(文林郞)이 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증조가 된다. 이 분이 합문지후(閤門祗侯) 휘 연(淵)을 낳으니 할아버지가 되고, 이 분이 이조정랑 휘 용(龍)을 낳으니 아버지가 된다. 공이 처음 아버지의 벼슬로 좌우위참군(左右衛叅軍)에 제수되어 충목(忠穆)왕과 공민(恭愍)왕 등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여러 번 합문부사(閤門副使)를 지내고 전공총랑(典工摠郞)을 거쳐 수원과 강화와 충주의 수령으로 나갔으며 모두 치적(治績)이 있었다.
내간(內艱)①을 만나 애훼(哀毁)②함이 예보다 지나쳤고, 위신(僞辛)③이 왕위를 답습하자 공에게 장수(將帥)의 재질이 있다고 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로 탁배(擢拜)④되고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에 보충됐다가 곧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서해도부원수(西海道副元帥)로 임명되었다.
전후 갈아가며 세 진(鎭)을 다스리니 성명(聲名)⑤이 더욱 드러났다. 그 공(功)을 기록하고 추성협찬(推誠協贊)의 호를 하사했다. 얼마 후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옮겨 명을 받들고 대명(大明)으로 조문을 가서는 전대(專對)⑥에 민첩함을 보였고 돌아와서는 지문하사(知門下事)에 제수됐다. 왜구(倭寇)⑦ 천수가 우리 나라의 남비(南鄙)⑧를 침범하여 지나는 곳마다 포학함을 남겼으므로 모든 장수들이 다 막지를 못했으나 공이 왕토(往討)⑨하여 모두 섬멸하니 이 때부터 다시 날뛰지 못하였다.
여러 번 옮겨서 서북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고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와 문하참찬(門下叅贊)을 지냈다. 동북에 왜경(倭警)⑩이 있었으므로 절월(節鉞)⑪을 받아 공격해서 물리쳤다. 그리하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요(遼)를 공격한 전쟁에 아태조(我太祖)의 창의(倡義)⑫를 도와 군사를 돌린 공이 많다고 해서 좌시중(左侍中)과 경기도통사(都統使)에 올랐다. 얼마 후 비어(飛語)⑬에 빠져 토산현(兎山縣)으로 귀양갔으나 곧 일이 밝혀져서 불리어 돌아와 좌시중이 됐다.
조선 태조가 보위에 오르자 회군(回軍)한 공을 추상(追賞)⑭해서 청성백(靑城伯)으로 봉했다. 송도(松都)에 성을 쌓은 일이나 새 도읍을 만드는 일에는 모두 공에게 명하여 역사를 총치(摠治)하게 하였으나 때를 넘기는 일이 없었고, 또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일도 없었고, 판문하령삼사(判門下領三司)를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면하고 사제에서 졸하니 춘추(春秋)가 74세였다. 부음이 보고되자 조회를 파하고 제문을 하사하며 부조를 예의 규정보다 더 지급해 주었으며 마전현(麻田縣)에 장자지냈다.
공의 품성(禀性)이 어질어 남을 용서하며 편안하고 고요하여 기쁨이나 성내는 일을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했고 생산(生産)에 힘쓰지 아니했다. 장상(將相)이 된 지 이십 년이 넘었으나 집에는 남은 재물이 없었다. 무릇 편지로 안부를 묻는 사람이 물건을 보내오면 문전에서 경계하여 거절하였다. 여러 자질이 벼슬에 제수될 때 문득 수족을 내밀어 그 군촉(皸瘃)⑮을 보이면서 말하였다.
『나는 출입(出入)에 부지런히 수고하여 바야흐로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너희들이 어찌 가만히 앉아서 작위(爵位)를 누릴 수 있겠느냐.』
벼슬에 있을 때는 강하고 과감하나 사사로움과 아첨함이 없었고 전쟁터에서는 적의 괴수를 죽이기는 했지만 쓸데없는 살육은 하지 아니했다. 그 조용하고 한가로울 때 항상 책을 대하고 있으니 그 소연(蕭然)함이 선비와 같았다고 한다.
처음 청원군(淸原君) 송유충(宋有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으니 인봉(仁鳳)은 도총제(都摠制)를 지냈고 의귀(義龜)는 판사(判事)가 되었으며 계년(繼年)은 목사(牧使)가 됐다. 두번째로 감문랑장(監門郞將) 문필대(門必大)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으니 징(澄)은 부윤(府尹)이요, 온(溫)은 영의정이며, 종(淙)은 청원군(靑原君)으로 경선공주(慶善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정(泟)은 동지총제(同知摠制)다.
징(澄)의 자손이 서로 잠영(簪纓)⑯을 이었는데 가장 영달한 사람은 광언(光彦)으로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우참찬(右콷贊)에 이르렀다.
영묘(英廟)⑰께서는 온(溫)의 따님을 왕비로 책봉하였는데 이분이 소헌왕후(昭憲王后)다. 후(后)의 아우 회(澮)는 영의정 청송부원군이요, 회(澮)의 아들 원(湲)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됐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순도(順道)는 돈녕도정이오, 순경(順徑)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청성군에 봉해졌고, 순문(順門)은 문과에 급제해서 영의정에 추증됐다. 아들 넷을 낳으니 연원(連源)은 영의정 청천부원군이요, 달원(達源)은 이조참판에 추증됐고, 봉원(逢源)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으며, 통원(通源)은 우의정이 되었는데 모두 문과출신이다.
청천의 아들 강(鋼)은 영돈녕 청릉부원군(領敦寧 靑陵府院君)이니 지금 왕비의 아버지다. 참판의 아들 전(銓)은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됐고, 우의정의 아들 뇌(鐳)는 무과에 급제하여 절도사(節度使)가 됐다.
또한 장경왕후(章敬王后)와 성렬(聖烈) 인명대왕대비(仁明大王大妃)와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는 모두 이성(異姓)⑱의 후예(後裔)다. 그 밖에 조정에 가득하도록 귀현(貴顯)⑲한 사람들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이것이 어찌 공이 덕을 쌓아서 남긴 경사가 아니겠는가.
공께서 돌아가신 뒤 집이 준난⑳을 만나 신도에 비가 없었는데 참찬이 개연(慨然)하게 부르짖으니 내외의 자손들이 모두 기쁘게 소리에 응답해 주었다. 이리하여 그 중 능한 사람을 선택해서 진(鎭)과 호(鎬)와 융에게 그 일을 맡기고 통원(通源)으로 하여금 명(銘)의 글을 쓰게 하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대략(21)을 위와같이 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심가(沈家)는 청부(靑鳧)(22)에서 대대로 그 덕을 쌓음이라. 문림(文林)과 이랑(吏郞)은 날기는 했어도 날개를 떨치지 못했는데 다만 공께서 그것을 이으시어서 소리로 그 그릇임을 알리시었다. 중외의 벼슬을 지내면서 능력을 시험하여 점점 큰 벼슬에 오르시었다. 섬 오랑캐 날뛰며 기리 몰아와 꺼림이 없었을 때 공이 사명(司命)을 받아 저 추악한 무리를 섬멸(殲滅)했네. 압록강(鴨綠江)에서 회군하여 돌아올 때 비록 성지(聖智)(23)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창졸간(倉卒間)에 대책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협의(協議)를 도우심 때문일세. 하늘이 큰 운을 열으시니 드디어 중태(中台)에 발탁되었네. 조매(調梅)(24)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언덕에 묘터 잡기를 이렇게 재촉했네. 산과 강이 근원 있어 그 흐름 다하지 아니하네. 자손의 길 많이 열려 모두 성스럽고 착한 이만 나왔네. 어찌 하나의 문중에서 세 분의 왕후(王后)가 태어나셨을까. 앞뒤의 정승의 자리에 하물며 그 자손이 많이 있음이리오. 임단(臨湍)에 분묘(墳墓)만 있고 오랫동안 칭송하는 비석이 빠졌었네. 참찬이 개연히 일어나서 처음 새비를 다듬었네. 묘도(墓道)의 영화스러움이 능히 이와 같이 완전할까. 흰 돌은 높이 솟고 맑은 물결 출렁이네 높으시구나. 훈업(勳業)이여 백대(百代)가 되도록 드러나리라.』
오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인 통원(通源)은 짓다.

註① 내간(內艱):어머니의 상고(喪故) 내는 안 외는 밖. 간은 어려움. 즉, 상고라는 뜻.
② 애훼(哀毁):부모의 죽음을 슬퍼하여 몸이 매우 훼손됨.
③ 위신(僞辛):고려때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우왕과 창왕은 고려왕족인 왕씨가 아니고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거짓 왕씨 노릇을 하여 왕이 되었다가 내중 이성계(李成桂)에게 폐출(廢出) 당한 데서 이르는 말.
④ 탁배(擢拜):탁수(擢授) 발탁(拔擢)하여 고관(高官)을 수여함.
⑤ 성명(聲名):명성(名聲) 남들이 칭찬하는 좋은 평판(評判).
⑥ 전대(專對):단독으로 상대함 또는 타국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군명(君命)을 완수함.
⑦ 왜구(倭寇):일본에 사는 해적으로 우리 나라의 여러 지방을 침략하여 도적질하므로 부쳐진 이름.
⑧ 남비(南鄙):비(鄙)는 도시가 아닌 농촌 지역. 남비는 우리 나라 남쪽에 있는 농촌.
⑨ 왕토(徃討):가서 정벌함. 침략한 적을 맞이하여 공격함.
⑩ 왜경(倭警):왜구(倭寇)가 침략한 것을 알고 대비하도록 발하는 경보.
⑪ 절월(節鉞):천자가 적을 치려고 가는 장수에게 주는 부절(符節)과 도끼.
⑫ 창의(倡義):국난을 당해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는 일.
⑬ 비어(蜚語):사실과 다른 뜬 소문.
⑭ 추상(追想):논공행상(論功行賞)이 끝나거나 사건이 마무리 된 뒤 새로운 공적이 인정되어 추가로 내리는 상. 벼슬과 재물.
⑮ 군촉(皸瘃):손이 트고 발에 얼름이 박힘. 또는 균렬(龜裂)과 동상(凍傷).
⑯ 잠영(簪纓):관원(官員)이 쓰는 관(冠)에 꽂는 비녀와 갓끈 전하여 고관(高官).
⑰ 영묘(英廟):조선조 제四대왕인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묘호(廟號).
⑱ 이성후예(異姓後裔):직계자손(直系子孫)이 아닌 자손. 외손(外孫).
⑲ 귀현(貴顯):이름을 나타내서 신분이 귀하게 된 사람.
⑳ 준난(屯難):어려움. 즉, 전쟁으로 인한 난리.
  (21)경개:사건의 줄거리. 개요(槪要)·대략(大略).
  (22)청부(靑鳧):푸른 오리이니 즉, 청송의 옛이름.
  (23)성지(聖智):임금의 지혜.
  (24)조매(調梅):벼슬길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