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백산소사적

漣川 四世祖 靑城伯諱德符山所事蹟
山在京畿道漣川郡嵋山面峨嵋里(元麻田郡西面長揚里)西南距京一百二十里艮脉丑坐之原與夫人門氏上下封有神道碑玄孫右議政通源撰五代孫府尹銓書初配宋氏疑其合窆於上墳每節享祀時兩位合設矣 英宗己卯都摠制公後孫居原州宗人尋得都摠制公配位東陽郡夫人申氏墓於淸州之艾洞卽今粉坪里有上下墳而下墳前有短碑刻以上姑墓下東陽郡夫人申氏之墓云刻剜僅辨字畫自宗中再次送有司驗之無誌石可考後壬辰後孫輔國鏽按節畿甸時責城伯墓崩頹使族人東殷徃審封築東殷欲驗其合窆與否橫截墳土奉審則非合窆也然則宋夫人墓之在粉洞分明無疑以後享祀單設舊有位田齋閣享四時節祀世漸衰退儀式頓减每年以三九月十五日享祀使墓奴奉行未知自何時定行也今番自宗中更定祭需儀式以行之一如安城山所例遵守勿替
 山野面積 四拾五町參段壹畝八步(拾參萬五千九百參拾八坪)
 享祀定日 每年三月十五日 九月十五日
 祭需品數 三獻(庚申新定) 幷山神三床
 一如安城山所例
 齋閣
墓閣  草葺二棟

연천 4세조 청성백휘덕부산소사적(번역문)
산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원래는 마전군 서면 장양리)에 있으니 서남으로 서울까지의 거리가 120리이며 묘소는 정동북쪽으로 뻗은 산맥의 축좌원이요 배위 문씨와 상하봉이다. 신도비명은 현손 우의정 통원(通源)이 지었고 五대손 부윤 전(銓)이 글씨를 썼다. 초배 송씨를 상분에 합장하였는지 의심되어 철마다 향사때 양위합설 하였더니 영조기묘에 도총제공의 후손으로 원주에 사는 종인이 도총제공 배위 동양군부인신씨묘가 청주의 애동(지금의 분평동)에 상하분으로 되어 있는 무덤을 찾았는데 하분의 앞에 작은 비석이 있어 위는 고묘이고 아래는 동양군부인신씨(東陽郡夫人申氏)의 묘라고 되어 있었다. 비석의 글씨가 마멸되어 겨우 자획을 구별할 만하므로 종중에서 재차 유사를 보내어 증험하여 보았으나 지석에 참고될 만한 것이 없었더니 그 뒤 임진년에 후손 보국 수(鏽)가 경기감사로 재직시에 청성백묘가 붕괴되어 족인 동은(東殷)으로 하여금 가서 봉축을 살피게 하니 동은이 그 합장여부를 살피고자 묘를 가로로 파서 봉심하였으나 합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송부인 묘가 청주 분동에 있음이 분명하므로 그 후부터 단설로 향사하였다. 그 전에는 위전과 재각이 있어 4시절사를 행하여 왔으나 세상이 점점 쇠퇴하고 의식도 절감되어 매년 3월과 9월 15일 향사를 묘직이로 하여금 봉행하여 왔으나 언제부터 정하여 행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이번에 종중에서 제수의식을 다시 정하여 봉행하니 안성산소의 예와 같이 따르게 하고 바꾸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