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문지후공산소사적

咸悅南堂山 二世祖 閤門祗侯公諱淵山所事蹟
南堂山在全羅北道益山郡咸悅面南堂里(元咸悅縣東四面造旺里)距京城四百四十里金馬山西走爲屹山又西行起龍旺山北折逶迤十餘里巽巳起左旋落辰巽逶迤巽入首辰坐上下封世久失傳訪求不得歲乙酉臨陂居后孫圭赴擧於礪山鄕所與本鄕金璘同舘欸甚金生謂圭曰君之先世有閤門祗侯諱淵字耶圭曰然璘曰君知其墓所否圭曰不知也璘曰吾先墓在咸悅傍有古墓墓有碣書職啣姓名故吾知之言語之際金璘之叔自外而入呵禁其姪璘漫漶囁嚅更不答言盖金生年幼不知輕重率口而發聞其叔之呵而不復言也圭歸告于宗長俊元俊元卽送子懇問于金璘之父應三應三牢諱不言告于京宗中自宗中定有司數次徃訪金應三應三愈堅諱盖應三自其先竊公墓地葬已數世也潛沉標石于水中掘取誌石沉池永爲掩遮後孫仲良守潭陽時竭誠購得誌石所沉處遂卽告官乙未春決水拯奉誌石石長八寸廣四寸許書三行中書閤門祇侯沈淵之墓左書屹山下南堂山辰坐戌向右書洪武十年丁巳九月十二日葬字刻完然金亦知不敢隱乃輸情遂悉移其冒葬之塚后孫檀仲良尙尹尙鼎與京鄕諸宗聚會改封上下墓皆像馬鬛仍舊制而碣已毁矣考妣位次無徵考亦不敢强辨乃立碣於兩墓之間瘞舊誌於牲石下失傳二百餘禩而始尋封塋碣文十三代孫仲良撰十五代孫埈書肅宗四十六年庚子立
守護奉享等節一依普光例使本郡戶長擧行多置位田以三九月十五日定日享祀建齋閣置墓直守之定山有司管察甲午後廢戶長一任於山有司山野區分測量時以宗中所有申告
山野面積 六拾參町七段五畝貳拾壹步(拾九萬壹千貳百七拾壹坪)
享祀定日 每年 三月十五日
九月十五日
祭需品數 三獻 (己未新定) (幷山神三床)
飯米四升五合 羹 餠白米六斗 粘米三斗 麵 白淸 炙肉炙魚炙雉炙 湯五品 佐飯 醢 菜蔬生熟二品 沉菜 淸醬 醋醬 脯肉脯五片魚脯五片文魚全鰒 食醢 肝納四品(幷膾) 果六品 祭酒米十斗 丹香一封(高排尺數有定式)
齋閣
敬瞻樓 瓦葺一棟五間四面退
永慕齋 瓦葺一棟四間四面退
祭物熟所  瓦葺一棟三間
翼廊 瓦葺一棟五間
墓直舍 草葺一棟四間
外山直幕 草葺二座

함열남당산 2세조 합문지후공휘연산소사적(번역문)
남당산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咸悅)읍 남당리(원래는 함열현 동사면 조왕동)에 있으니 서울에서 4백리이며 금마산이 서쪽으로 뻗어 흘산이 되고 또 서쪽으로 가서 용왕산이 되고 북쪽으로 꺾어 구불구불 10여리를 가다가 손사(巽巳)방향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진손(辰巽)이 구불구불 손입수진(巽入首辰)① 좌로 상하봉을 모셨더니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하여 찾다가 못 찾았다. 을유년에 임피에 사는 후손 규(圭)가 여산 향소(鄕所)에 과거보러 갔다가 이 고을 김린(金璘)과 같이 유숙하며 정답게 이야기 하던 중 김생이 규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선세에 합문지후(閤門祗侯)② 휘 연(淵)자가 계신가? 규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린이 말하기를 그대가 그 묘소를 아는가? 규가 모른다 하니 린이 말하기를 나의 조상묘가 함열에 있는데 옆에 오래된 묘가 있고 비석이 있어 직함과 성명이 쓰여 있으므로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을 하고 있을 즈음에 김린의 숙부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심하게 꾸짖자 그 조카가 어쩔 줄 모르고 다시는 대답하지 않으니 대개 김생이 나이가 어리어 경중을 모르고 경솔하게 말하다가 그 숙부의 꾸지람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규가 돌아와서 종장(宗長)③ 준원(俊元)에게 고하니 준원이 곧바로 아들 간(懇)을 보내어 김린의 아비 응삼에게 물으니 응삼은 굳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서울 종중에 고하니 종중에서는 유사를 정하여 수차 김응삼을 찾아가 말하였으나 응삼이 더욱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을 않으니 대개 응삼은 그 선조 때부터 공의 묘지에 도장(盜葬)하여 이미 몇 대가 된지라 표석(表石)과 지석(誌石)을 파내어 연못에 던져서 영원히 흔적을 없애려 함이었다. 후손 중량(仲良)이 담양군수로 재임시 정성을 다하여 지석이 잠긴 곳을 찾아내었고 이어 관에 고하였다. 을미년에 물을 퍼내어 지석을 봉득하니 돌의 길이가 여덟치로 넓이는 四치가 되는데 석줄로 쓰여있고 그 가운데에는 합문지후심연지묘(閤門祗侯沈淵之墓)라 하고 왼쪽에는 흘산하 남당산 진좌술향이라 하였으며 오른쪽에는 홍무10년 정사9월12일장이라 하였으니 새겨진 글씨가 뚜렷하였다. 김은 감히 더 숨길 수 없어 드디어 이실직고하고 그 몰래 쓴 묘를 이장하였다. 후손 단(檀) 중량(仲良) 상윤(尙尹) 상정(尙鼎)이 경향제종과 함께 모여서 상하분으로 개봉하였고 산소를 옛 모양대로 썼으나 비갈(碑碣)이 훼손되어 고비(考妣)의 위치를 징고(徵考)할 수 없었으며 감히 강변할 수도 없어 두 묘의 사이에 비갈을 세우고 옛 지석은 비석밑에 묻었다. 실전한지 2백여년에 비로소 봉영(封塋)을 찾았으니 갈문은 13대손 중량(仲良)이 짓고 15대손 준(埈)이 글씨를 썼다. (숙종 46년 경자년에 세움)
수호봉향등 절차는 보광산의 예에 의하여 본군 호장으로 하여금 거행케 하고 위전을 많이 두어 3월 9월 15일을 정하여 향사하며 재각을 짓고 묘직을 두어 수호케 하였다. 산유사를 정하여 관찰하여 오다가 갑오년 이후 호장을 폐하고 산유사에 일임하였으며 산야구분 측량시에 종중소유로 신고하였다.

註① 巽入首辰:辰坐=西北方
② 閤門祗侯:제사 일을 맡아보는 관청(李朝에서는 通禮院)
③ 宗長:집안의 어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