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산시조산소사적 |
普光山始祖山所事蹟 普光山在慶尙北道靑松郡靑松面德洞(元府內面)距邑治西南五里相望之地一水限之右旋戌龍辛坐墓前有短碑只書麗朝文林郞衛尉寺丞沈洪孚之墓水口巖石揷天如芙蓉出水世傳古昔巖形奇險葬日之前夕忽然雷震山岳碎破險石削出玉筍至今人謂賢妃巖盖地家所謂應 壼儀之慶兆云故也大川從外靑龍環賢妃巖而西下如彎弓之形 昭憲 仁順兩位王后連遣中使環山種栢子木使本府守護禁養滿山蒼蔚除給結數位田幷屬之本府戶長管理備奉四時享祀(正朝寒食端午秋夕)祭需自官廳奉行且以工曹匠十一名除給祭物軍其後加定十六名合爲二十七名前後節目冊子及改量文書藏之府司使之遵守勿替后孫領相壽賢以均田使普光局內田畓盡付之量外使戶長收稅以助祭需十五代孫鳳輝以本府使改爲打量加得七十餘卜付之發告於宗人之作宰道內者合力辦備祭器而舊無香爐石亦新備之鳳輝之子聖希以本道伯改備床石撰記事聖希之侄公著守永川時改表石墓前有萬歲樓享祀時値雨則行祀於樓上本府客舍南有讚慶樓前臨大川水漲不能渡則望而祭之於樓上盖戶長家在府內祭需自官廳進奉故也甲午以後結數陞總戶長廢之幾百年奉享節次狼狽自宗中選定山有司府南府西宗族中一人式一年一差使之守護享祀以寒食秋夕定行宗有司總爲管理 傳來位土大典雙溪兩寺僧侶輩盡爲潛賣歲辛丑後孫相翊査得本府量案推還府東面三宜里田二十二斗七升五合落畓四十四斗一升落垈五斗四升落縣南面堂洞里田三十四斗四升一合落畓二十二斗八升五合落垈二斗七升五合落合一百七十六筆謄本量案踏官印藏之宗櫃後復喪失宗有司掌禮卿相漢依宗議賣松楸買土以屬之己未山野區分測量時以宗中共同所有連署申告 山野面積 壹百九町貳段壹畝貳拾壹步(參拾貳萬七千六百五拾壹坪) 享祀定日 寒食 秋夕 祭需品數 三獻殷奠 (幷山神二床) (高排尺數有定式) 飯米四升 羹 餠米八斗 麵 白淸 炙肉炙魚炙雉炙素炙 湯十二品 佐飯切肉 醢 菜蔬生熟二品 沉菜 淸醬 醋楪 脯肉魚合設 食醢 肝納三品(幷膾) 果七品 祭酒七鐥 黃燭一雙 丹香一封 按古有祭物單子報來之規矣挽今不脩自今後使山有司祭後祭物單子及叅祭宗人名記報明於宗有司以遵舊規各處山所一例施行 齋閣 萬歲樓 瓦葺一棟六間四面退 追慕齋 瓦葺一棟六間 墓直舍 瓦葺一棟 萬歲樓在普光山普光寺前而寺本沈氏齋宮也刱造未知在何時意必吾家所立也幾百年守護保有矣粤辛亥因寺刹令該寺與寺垈地及山田幾座幷爲見奪只存萬歲一樓爲祭閣府內讚慶樓亦沈氏祭閣也攷諸洪汝方讚慶樓記文與尤菴宋文正公時烈記文則其槩意可知而記文中郡守河公所建云者意或因兩 聖母命意而蕫役歟文獻莫憑年前編入於公廨屬之官有但垈地以沈氏宗中所有登錄於土地臺帳 청보광산시조산소사적 보광산은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동(원래는 부내면)에 있으니 읍내에서 서남쪽으로 5리쯤 되고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강물이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고 술룡신좌이며 묘전에 작은 비석이 있으니 다만 고려조의 문림랑 위위시승 심홍부의 묘라 쓰여 있다. 물이 흘러나오는 곳에는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모양이 연꽃이 물위로 솟아 있는것 같아 장쾌하고 기묘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 세상에 전하여진 말에는 옛날 바위모양이 기이하고 험준하더니 장사지내던 전날 저녁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 산을 치면서 험한 돌을 부수고 옥순(玉筍)①이 솟아 나온 것 같으니 완연히 연꽃의 모양이라 고을사람들이 현비암이라 하였으니 대개 지가서(地家書)②에서 말하는 왕비가 탄생할 경조(慶兆)라는 것이다. 큰 냇물이 외청룡을 따라 현비암을 둘러싸고 서쪽으로 흘러내려 활의 모양을 이루었다. 소헌 인순 두 왕후가 연달아 중사(中使)③를 보내어 온 산에 잣나무를 심게 하고 청송부로 하여금 수호하게 하여 만산이 울창하여졌으며 몇 결(結)의 위토를 장만해 주고 청송부에 병속시켜 호장이 관리하였으며 사시(4時)④에 시향을 봉행케 하였다. 제수는 관청에서 봉행하게 하고 또 공조의 장인 11명을 제물군으로 보낸 바 그 뒤 16명을 더 보내어 27명이 되었다. 전후의 규칙조목의 책자와 개량문서를 부의 청사에 보관하여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후손 영상(領相) 수현(壽賢)이 당시 균전사(均田使)⑤로서 보광국내 토지대장외 전답도 등재하게 하고 호장으로 하여금 수세케 하여 제수에 보태 쓰게 하였다. 15대손 봉휘(鳳輝)가 청송부사로 재임시 전답의 측량을 다시 하여 70여복을 더 붙여주고 종인으로서 도내 수령으로 오는 사람에게 권고하여 힘을 합해서 제기를 장만하고 그전에 없었던 향로석을 신설하였다. 봉휘의 자 성희(聖希)가 본도의 도백으로 와서 상석을 개비하고 기사를 찬하였으며 성희의 질 공저(公著)가 영천군수로 재임시 표석을 고쳐 세웠다. 묘 앞에 만세루가 있으니 제사를 지낼 때 비가 오면 만세루상에서 행사하였으며 본부의 객사 남쪽에 찬경루가 있으니 그 앞에 큰 내가 있어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게 되면 찬경루상에서 망제(望祭)를 지냈으니 대개 호장의 집이 부내에 있어 제수를 관청으로부터 진봉하기 때문이다. 갑오년 이후로는 토지의 결수를 승총(陞總)⑥하고 호장을 폐하니 몇 백년 동안 행하여오던 봉사절차가 낭패되었다. 종중에서 산유사를 선정하여 부남과 부서종중에서 1년에 1인씩 정하여 수호하고 향사케 하되 향사는 한식과 추석 두 번으로 정하여 종유사가 총관리를 하게 하였다. 전해 내려온 위토는 대전사와 쌍계사 두 절의 중들이 다 판 것을 신축년에 후손 상익(相翊)이 본부의 토지대장을 조사하여 부동면 삼의리의 밭 22두 7승 5합지기와 논 44두 1승지기와 대지 5두 4승지기와 현남면 당동리의 밭 34두 4승 1합지기와 논 32두 8승 5합지기와 대지 2두 7승 5합지기 도합 170필지를 돌려 받고 대장을 등본하여 관인을 찍어 종중의 궤속에 보관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잃어버렸다. 종유사 장례경(掌禮卿) 상한(相漢)이 종의에 의하여 소나무등을 벌매하여 토지를 매입해서 더 보태었다. 기미면 산야구분 측량시에 종중공동소유로 연명날인하여 신고하였다. 산야면적은 109정 2단 1무 21보(參拾貳萬76501평)이다. 註① 玉 筍:죽순(竹筍)의 미칭(美稱) ② 地家書:지술(地術)을 기록한 책 ③ 中 使:내시 ④ 4 時:정조(正朝:월명절) 한식(寒食) 단오(端午) 추석(秋夕) ⑤ 均田使:논밭에 관한 일을 감독하는 임시벼슬 ⑥ 陞 總:징세(徵稅)에서 빠진 논밭을 세부(稅簿)에 기록하던 일 향사일 한식 추석 제수품수 3헌으로 넉넉한 제물(산신제까지 2상) (높이의 척수에 제한이 있다) 메쌀 4되, 국, 떡쌀 8말, 면, 꿀, 적(육적·어적·치적·두부적), 탕(12가지), 좌반(저민살고기), 혜, 채소(생것·익힌것 2가지), 침채, 청장, 식초접시, 포(육·어 합설), 소금, 간납(세가지 회포함), 과일(7가지), 제주(7복자), 황초(1쌍), 단향(1봉지) 제각 만세루 기와집 1동 6칸 4면 툇마루, 추모재 기와집 1동 6칸, 묘지기집 기와집 1동 만세루는 보광산 보광사 앞에 있었고 절은 본래 심씨의 재궁이었으니 언제 창건된 지는 모르겠으나 생각컨대 우리의 집에서 지은 것이 틀림없다. 몇 백년 동안을 수호하며 보유하였다가 신해(辛亥 1911)년 사찰령에 의하여 그 절과 절의 대지 및 산과 밭 몇 자리를 모두 빼앗겼고 다만 만세루와 추모재만 제각으로 남아 있으며 부내 찬경루도 심씨의 제각이다. 홍여방(洪汝方)의 찬경루기문과 문정공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기문을 참고하여 보면 대략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기문중에 군수 하공(河公)이 지은 것이라고 한 것은 두 성모가 명령하여 하공이 공사를 감독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문헌을 증빙할 수 없어 연전에 관가의 소유건물로 속하여 있는 것을 대지만을 심씨종중 소유로 토지대장에 등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