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태현리(泰峴里) 태릉촌(泰陵村(現 臥龍面))에서
출생(出生)하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하(門下)에 유학(游學)하다.
좌우위참군(左右衛參軍)에
임명(任命)되다.
가정선생(稼亭先生)의
아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동갑동문(同甲同門)으로 래방(來訪)하다.
사온사직장(司醞寺直長)을
거쳐 正이 되다.
목은이색(牧隱李穡)을
방문(訪問)하여 詩를 짓다.
사농포총제(司農圃摠制)가
되다.
감창(監倉)의
부정(副正)에 제수(除授)되다.
전농관학교수(典農管學敎授)가
되다.
중랑장겸합문인진부사(中郞將兼閤門引進副使)가
되다.
통직랑추밀원전리총랑(通直郞樞密院典理摠郞)이
되다.
명순대부위위사주부(明順大夫衛尉寺主簿)가
되다.
통선대부대명부판관(通善大夫大明府判官)이
되다.
봉선대부합문부사(奉善大夫閤門副使)가
되다.
봉상대부전공총랑(奉常大夫典工摠郞)이
되다.
중현대부(中顯大夫) 소부윤(少府尹)에 전직(轉職)되다.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가다.
강화부사(江華府使)로
나가 교육(敎育)을 진흥(振興)시키다.
형옥사(刑獄事)를
거쳐 병마사(兵馬使)가 되다.
왜구토벌(倭寇討伐)에
출정(出征)하여 중문령(中門嶺)에서 격퇴(擊退)하다.
전농사(典農司)와
판도사(版圖司)의 제거사(提擧事)가 되다.
통헌대부중추원도정(通憲大夫中樞院都正)을
역임(歷任),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어 선정중 모친상(善政中 母親喪)으로
사임(辭任), 충주(忠州)에서 안성(安城)까지 분상(奔喪)하다.
복상(服喪)을
마치고 정순대부판위위사사(正順大夫判衛尉寺事)가 되다.
우상시(右常侍)가
되고 2月에 안효공(安孝公)을 낳음.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義判書)를
거쳐 강계 도만호(江界 都萬戶)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歷任)하고
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가 되다.
동지밀직사사겸상호군(同知密直司事兼上護軍)이
되고 3月에 서해도부원수겸도순문사(西海道副元帥兼都巡問使)가 되었으며
6月에 왜구(倭寇)가 신주(新州) 등 사현(四縣)을 침공(侵攻)하므로
양백익원수(梁伯益元帥)와 더불어 격퇴(擊退)하고 賞을 받았고 9月에
합문지후공(閤門祗侯公)의 묘소(墓所)를 산청(山淸)에서 남당산(南堂山)으로
천장(遷葬)하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제수(除授)되어 8月에 라세(羅世)와 더불어 전함(戰艦)으로 제도(諸道)의
왜구(倭寇)를 색출(索出)한 功으로 추성협찬공신(推誠協贊功臣)의 號가
내리고 판밀직사사겸 상호군(判密直司事兼 上護軍)에 옮겼다가 10月에
사신(使臣)으로 중국(中國)에 갔고 광정대부(匡靖大夫)가 되다.
3月에
귀국후(歸國後)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상의회의도감사겸 상호군(商議會議都監事兼
上護軍)에 제수(除授)됨. 휴가(休暇)를 얻어 선영(先塋)에 성묘(省墓)하고
목은이색(牧隱李穡)과 만나 詩를 지음. 서해도원수(西海都元帥)가 되었다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다.
삼남도원수(三南都元帥)가
되다. 때에 왜구(倭寇)가 전함삼천척(戰艦三千隻)으로 남해안(南海岸)에
침입(侵入)하여 약탈(掠奪)이 자심(藉甚)한지라 제장(諸將)을 보냈으나
제어(制禦)치 못하고 용만(龍灣)과 진포(鎭浦)로 옮기면서 그 세력(勢力)이
커지므로 公에게 전함사십척(戰艦40隻)으로 토적(討賊)케 하니 적진(賊陣)을
기습(奇襲)하여 완전섬멸(完全殲滅)시켜 다시는 왜구(倭寇)가 도양(跳梁)치
못하게 하니 王이 금오십량(金50兩)을 賞으로 내리다.
이성계(李成桂)가
남정(南征)할 때 公에게 청원(請願)하였으므로 원정(遠征)하여 동남지방(東南地方)에서
위덕(威德)을 떨치었다.
서북면도순문사겸평양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尹)에
제수(除授)되어 성곽(城郭)을 완전보축(完全補築)하니 그 아름다움을
포상(褒賞)하다.
오랑캐의
亂이 있었는데 公에게 변방(邊方)의 안전책(安全策)을 하문(下問)하니
좋은 방책(方策)을 상주(上奏)할 때마다 채택(採擇)되었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가 閏11月에 찬성사(贊成事)가 되다.
4月에
찬성사(贊成事)로 동북면(東北面)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북청(北靑)과
함주(咸州)의 경계(境界)에서 발호(跋扈)하는 왜구(倭寇)를 섬멸(殲滅)하고
7月에 단천(端川)에 침입(侵入)하여온 왜구(倭寇)를 격퇴(擊退)하고
또 일백오십척(150隻)으로 함주(咸州), 홍원(洪原), 북청(北靑),
함남북(咸南北) 등지에 침공하는 왜구(倭寇)를 섬멸(殲滅)시키는 功을
세우고 환경(還京)하여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다.
환국(還國)하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다.
2月에
오랑캐 합목아단(哈木兒丹)이 6鎭을 침공(侵攻)할제 출정섬멸(出征殲滅)
시키고 9月에 광정공신(匡定功臣)의 號를 받다.
요동정벌(遼東征伐)에
출정(出征)하였다가 이성계(李成桂)와 뜻을 같이하여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우왕(禑王)을 廢하고 창왕(昌王)을 세웠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제수(除授)되고 충근량절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同德安社功臣)의 號를
내리다.
11月
폐가입진(廢假立眞)으로 昌王을 廢하고 강화(江華)로 귀양보내고 신종(神宗)의
7代孫 요(瑤)를 옹립(擁立)하여 공양왕(恭讓王)으로 즉위(卽位)한 後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겸도평의사사사령효사관사판상서사상호군영경연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兼都評議使司事領孝思觀事判尙書事上護軍領經筵事)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이때 이성계(李成桂)는 수시중(守侍中)에 유임(留任)되다.
12月에 청성백(靑城伯)을 비롯한 구공신(九功臣)에게 교지(敎旨)와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의 號인 중흥공신록권(中興功臣錄券)이
하사(下賜)되고 청성군개국충의백(靑城君開國忠義伯)에 봉작(封爵)되었으며
식읍일천호(食邑1000戶) 실식봉삼백호(實食封300戶) 전토일백오십결
노비십오구(田土1百50結 奴婢15口)가 내렸으며 록권(錄券)에 의거(依據)
아버지에게 문하시중(門下侍中)의 증직(贈職)과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의
爵이 추봉(追封)되다.
4月에
마일필(馬1匹), 은괴(銀塊)한덩이, 비단, 명주 각오필(各五疋), 금대(金帶)한개와,
전토일백결(田土1百結)이 하사(下賜)되다. 한양(漢陽)으로 천도(遷都)하여
전제(田制)를 개혁(改革)하였고 12月 척질조유(戚姪趙裕)의 옥사(獄事)와
관련(關聯)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사퇴(辭退)하고 토산(兎山)으로
귀양가다.
1月에
신원(伸寃)되고 2月에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작(封爵)되면서
사전(賜田)이 되다. 9月에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除授)된
後 未久에 하정사(賀正使)로 明나라에 출발(出發)하기 前에 안사공신(安社功)臣의
號가 내리다.
3月에
환국(還國)한 後 4月에 수시중정몽주(守侍中鄭夢周)가 살해(殺害)된데
對한 도의적책임(道義的責任)을 지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사임(辭任)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다. 오월말 역성혁명과업(五月末 易姓革命課業)이
무르 익어가자 칭병(稱病)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사퇴(辭退)하고
은거(隱居)하던중 7月 17日에 이성계(李成桂)가 등극(登極)하다.
7月에
위화도회군추상(威化島回軍追賞)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號가 내리다.
10月에 6男 淙이 경선공주(慶善公主)에게 장가들어 청원군(靑原君)에
봉군(封君)되다.
1月에
신년하례차이태조(新年賀禮次李太祖)를 심방(尋訪)하고 송도수축(松都修築)의
총괄책임(總括責任)을 맡아 이월말(2月末)에 완성(完成)시키다. 9月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判事)에 제수(除授)되어
총치책임(總治責任)을 맡아 도시(都市)의 구획정리(區劃整理), 사직단(社稷壇),
종묘궁궐(宗廟宮闕)의 조성사업(造成事業)에 착수(着手)하다.
1年間에
사직단(社稷壇), 종묘(宗廟)를 완성(完成)하고 삼백구십간(390間)의
궁궐(宮闕)을 조성(造成)하여 10月에 입궁(入宮)하고 잔여공사(殘餘工事)는
계속(繼續)함. 청파동(靑坡洞)에 사저(私邸)를 신축(新築)하고 청허정사(淸虛精舍)라함.
後日 청파동(靑坡洞)을 청송심향(靑松沈鄕)이라 稱하다.
6月
신도궁궐조성공사(新都宮闕造成工事)가 완성(完成)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제수(除授)되다.
9月
영삼사사(領3司事)에 제수(除授)되다.
12月
특진보국숭록대부문하부좌정승(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府左政丞)에 제수(除授)되다.
3月에
병환(病患)으로 좌정승(左政丞)을 사퇴(辭退)하다.
1月
14日 별세(別世)하니 국민(國民)이 애도(哀悼)하고 태종(太宗)이 부음(訃音)을
듣고 철조삼일(輟朝3日)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케하고 미두(米豆)
각일백석(各100石)을 부의(賻儀)하고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아미리(峨嵋里)에 예장(禮葬)하였으며 시호(諡號)를 定安이라 내리고
부조(不祧)의 교지(敎旨)가 베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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