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범례(壬辰譜) |
凡例一依癸巳譜而不可不添潤條件開列于左
1, 文林郞以下五世爲諸派之源故初起另作五階爲原編以寓立大本之意自再起以下依癸譜作七階各以派分以達支流而每起上階人諱右傍細書前疊之分派祖禰諱字以溯其本 1, 始祖旣書姓各派之起於上階人不復書姓以明一本 1, 生年必書年表而如父子兄弟同一年表旣書於其父兄則更不疊書以從省簡 1, 官爵只書職名有欠太畧故今加各司各邑名而大匡則書至字輔國以下則書止字在世人書今字或前字以標之有 贈諡則備書太常訓誥郞階雖非正職以此題主則不可不書 1, 年過七十但書卒年則與十歲以後有相混之慮故七十以上特書壽幾許以辨之 1, 碑碣表誌幷書某人撰某人書某人篆 1, 孝子烈女未蒙 旌贈者幷不得書別號則經行節義之表著及文集刊行崇品淸顯外幷不書 1, 配位某封從夫職自可推知今幷書以配字而十世以上則盡載四祖以下則只書父名及外祖顯祖詳於古而略於今也 1, 傍註皆從本階橫書而卷帙浩大務從要畧故次階空虛無上下相混之慮則幷竪註至末階俾無汗漫占紙之弊末階所書人如無子女則卽載傍註不爲更起 1, 癸譜子女從年次而今則先男後女以嚴宗統女婿名下書序一序二以別年次 1, 繼后子直書以子字以重繼軆之義而傍註錄生父名以攷其本派昭穆如無繼后子而只有女則書以无男男女幷无擧則書以无后 1, 女婿只錄二代而傍註及子女錄依本宗竪註例書之以從簡便 1, 王后誕生派則無敢列書於子女行於本行只加四圈就最上階極行書某 王后 1, 癸譜則 王后誕生派雖外之外裔皆書之而世代漸遠戚聯益廣一派每多疊書反涉屑越故非直外孫則幷不敢書 1, 癸譜年少入錄人多有改名者一從新單名字釐錄癸譜或不無錯誤處者如安孝公女婿李崇之之誤書以朴崇之領中樞公配位閔氏外祖李蔓之誤書以李稷之類幷博考釐正 1, 女婿前后室亦詳錄俾無所生難分之弊 1, 庶子書於嫡女之下庶女之爲人副室者女婿名下書妾字有承嫡者則名下註以承嫡不曰配而曰娶不曰卒而曰終以存等威 1, 名字有犯先諱者或書半字或省一邊以示警責 1, 每板以千字文標識亦依癸譜而卷帙浩大不止於千板故每卷首輒自天字爲始如一卷則書以一天一地二卷則書以二天二地餘皆倣此 1, 今譜幷續舊添修故癸譜見漏之派載之附編以俟後日釐正 1, 各派譜單中遠寸繼后人所生派不見於原譜及附譜昭穆不分明則不入錄 1, 表德之或書或不書生卒之或不著年配位之只書父名不書顯祖者皆因本單所載故詳略不同勢所然也 1, 諸宗之散處鄕谷時存人所居邑名拈書於四起末階使宗中咸知各派所在處 1, 鄕居宗人多有譜單之未來處不無見漏之歎後日重修時如有文蹟之可據並許入錄 (번역문) 범례는 한결같이 계사보에 의거하였는데 첨가하여 손질하지 않으면 안될 사항을 아래에 상세하게 나열한다. 1, 문림랑이하의 五세는 모든 파의 근원이 되는 까닭으로 처음 시작하는데는 특별히 五계단을 만들어 원편을 삼아서 근본을 세우는 뜻을 나타내고 다시 시작하는 이하로부터는 계사보대로 7계단을 만들어 각각 파별로 나누어서 지파에 이르도록 하였으며 시작하는 상 계단마다 사람 이름의 오른 쪽 옆에 전첩에서 갈라진 파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자를 가늘게 써서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서 상고하게 하였다. 1, 시조에는 이미 성을 쓰고 각 파의 시작되는 상 계단의 사람은 다시 성을 쓰지 않고서 하나의 근본임을 분명하게 하였다. 1, 출생한 해는 반드시 연호(숭정갑신년(인조22년․ 1644년)이전은 중국의 연호를 쓰고 이후는 우리나라의 연대를 쓴다))를 쓰되 만일 부자와 형제가 같은 연호이며 이미 그 부형에게 썼으면 다시 거듭 쓰지 않고 간편하게 생략함을 따랐다. 1, 관직과 작위를 단지 벼슬 이름만을 쓰니 너무 소략한 흠절이 있는 까닭으로 지금은 각 관사와 각 고을의 이름을 더 쓰고 대광은 지(至)자를 쓰고 보국이하는 지(止)자를 쓰며 살아있는 사람은 금(今)자를 써서 표시하고 시호를 내린 이는 봉상시(太常)의 시호를 의정한 훈고문을 다 쓰고 낭의 품계는 비록 높은 벼슬은 아니더라도 이로써 신주를 썼으면 쓰지 않을 수 없다. 1, 나이가 70세를 넘은 이에게 다만 사망한 해만을 쓰면 십세이후의 사람과 서로 혼동될 염려가 있는 까닭으로 70세 이상은 특별히 수가 얼마라고 써서 분별하였다. 1, 비갈과 묘표와 묘지는 모두 아모가 짓고 아모가 썼으며 아모가 전서를 썼다고 하였다. 1, 효자와 열녀로서 정문과 증직을 받지 못한 이는 모두 쓸 수 없으며 별호는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하며 절조와 도의가 현저한 이와 문집을 발간하고 종1품의 높고 좋은 지위에 있는 이외는 모두 쓰지 않는다. 1, 배위의 모봉은 부직을 따라서 스스로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지금은 모두 배(配)자로서 쓰되 10세이상은 4조(父祖 曾高)를 다 쓰고 10세이하는 단지 아버지의 이름과 외조와 현조만을 써서 예전을 상세히 하고 지금을 간략하게 하였다. 1, 방주는 모두 본 계단을 따라 가로 쓰되 권수와 질수가 너무 많아 중요한 것만 추리고 나머지는 줄이는데 힘써야 하는 까닭으로 다음 계단이 비어 상하에 서로 혼동될 염려가 없으면 모두 끝 계단까지 주를 내려 달아서 방만하게 지면을 차지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으며 맨 끝 계단에 쓴 사람이 자녀가 없을 것 같으면 바로 방주를 쓰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 1, 계사보는 자녀의 연령의 차례를 따라서 기록하였지만 지금은 아들을 먼저하고 딸을 뒤에 써서 종통을 엄격하게 하였으며 여서의 이름 밑에는 서1 서2를 써서 연령의 차례를 구별하였다. 1, 계후자는 바로 자(子)자를 써서 조상의 뒤를 잇는 뜻을 중하게 하고 방주에 생부의 이름을 기록하여서 그 본파의 소목을 상고하게 하였으며 만일 계후자가 없고 단지 딸만 있으면 무남(无男)이라고 쓰고 아들과 딸이 모두 없으면 무후(无后)라고 썼다. 1, 여서는 단지 2대만을 쓰되 방주와 자녀의 기록은 본종의 주를 다는 예를 따라서 써서 간편함을 따랐다. 1, 왕후를 탄생한 파는 감히 자녀의 항렬에 나란히 쓰지 않고 본 칸에 단지 네개의 둥근 점만을 나타내고 제일 윗 계단의 꼭대기에 올려서 아모 왕후라고 썼다. 1, 계사보에는 왕후를 탄생한 파는 비록 외손의 외손이라도 모두 썼지만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척당이 더욱 광대하여 1파에서 거듭하여 쓰는 것이 많을 때마다 도리어 번거롭고 참월하게 되는 까닭으로 바로 외손이 아니면 모두 감히 쓰지 않았다. 1, 계사보에 나이 젊은이로 입보하여 등록된 이가 이름을 고친 이가 많이 있어서 한결같이 새로운 단자를 따라 이름자를 고치어 기록하였다. 계사보에 혹 착오된 곳이 없지 않음. 안효공의 여서 이숭지를 박숭지로 잘못 쓰고 영중추공의 배위 민씨의 외조 이만을 이직으로 잘못 쓴 부류와 같으니 모두 널리 상고하여 바로 고치었다. 1, 여서의 전 후실도 또한 자상하게 기록하여 소생을 분별하기 어려운 폐단을 없도록 하였다. 1, 서자는 정실 소생의 딸의 아래에 쓰고 서녀가 다른 사람의 소실이 된 이는 여서의 이름 밑에 첩(妾)자를 쓰고 서자가 적자로 된 이가 있으면 그 이름 밑에 승적(承嫡)이라고 주를 달고 배(配)라고 하지 않고 취(娶)라고 하며 졸(卒)이라고 하지 않고 종(終)이라고 하여 등급의 위엄을 존속시키었다. 1, 이름자가 조상의 휘자를 저촉함이 있는 이는 혹 반자를 쓰거나 혹은 한 획을 덜어서 잘못되었음을 경계하고 책망함을 보이었다. 1, 판본마다 천자문으로써 표지하였음은 또한 계사보에 의하였으되 권수와 질수가 너무 많고 커서 천판에 그치지 않은 까닭으로 책 머리마다 번번이 천(天)자로부터 시작하여 1권 같으면 1천(一天) 1지(一地)라고 쓰고 2권은 2천(二天) 2지(二地)라고 썼으며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1, 이번 족보는 모두 구보를 이어서 첨가 수록한 까닭으로 계사보에 누락되었던 파는 부록편에 등재하여서 후일에 바로 잡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1, 각파의 족보의 단자속중에 촌수가 먼데서 양자온 사람으로 생가 파계가 원보와 부보에 보이지 않아 소목이 분명하지 않은이는 족보에 넣어 기록하지 않았다. 1, 현저한 덕행을 어떤이는 쓰고 어떤이는 쓰지 않았으며 출생하고 사망한 해가 드러나지 않고 배위에 단지 아버지의 이름만을 쓰고 현조를 쓰지 않은이는 모두 본 단자에 기재된 대로 써서 자세하고 간략함이 같지 않음은 형세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1, 모든 일가들이 흩어져 사는 시골은 당시에 생존한 사람이 거주하는 고을 이름을 네번째 기두한 맨 끝 계단에 써서 종중으로 하여금 각파의 소재지를 다 알게 하였다. 1, 시골에 사는 종인들이 족보의 단자가 오지 않은 곳이 많이 있어서 누락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후일에 다시 수보할 때에 문적의 근거할만함이 있으면 모두 입록을 허용하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