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보(第4回) 번역문 |
我沈之譜族高祖父議政公通源首刊於順天府其後觀察使公銓曁我 王考靑陽君府君相繼增修板本在湖南値丁酉倭變而見失世遂無其傳矣幸舍弟校理熙世性聰而聞博諸族譜牒亦皆詗得無遺欲著海東氏族之誌有志未就而早逝獨手正吾譜止 王考行而止余常恐久而泯滅適宰榮川鋟之梓焉且 先世碑誌固宜盡刊而文夥力弱有未悉焉謹採 國乘與碑誌錄其梗槩以附于卷首著吾 先而不及傍親者以吾非作者也吾宗諸君子各欲著其先懿則盍於焉係之也歟己丑季冬上浣後孫通訓大夫行榮川郡守長世再拜謹書
(번역문) 우리 심씨의 족보는 족 고조부(族 高祖父) 의정공(議政公) 통원(通源)이 순천부에서 처음으로 간행하였고 그후 관찰사공 전(銓)과 우리 조고 청양군(靑陽君 義謙)께서 서로 계승하여 증보증수하시고 인쇄한 족보판본은 전라도에 두었다가 정유년(선조30년 1597)의 왜란(丁酉再亂)을 당하여서 잃어버리고 마침내 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더니 다행하게도 나의 아우 교리 희세(熙世)는 천성이 총명하고 견문이 해박하여 각 종족의 보책도 또한 모두 익히고 터득하여 해동씨족지(海東氏族誌)를 저술하려고 하였으나 뜻만 있고 착수하지 못한채 일찍 죽으니 유독 우리 족보만을 손수 바로 잡아 조고(祖考)의 항렬에 이르러서 그치었다. 이에 내가 항상 시일이 오래되면 흔적이 아주 없어질까 걱정하던중 마침 영천군수가 되어서 목판에 판각하여 인쇄하였다. 또 선대의 비문은 진실로 다 간행함이 마땅하거늘 문장이 많고 재력이 미약하여 다 인쇄하지 못함이 있다. 삼가 국사와 비문을 채집하여 그 대강만을 책머리에 부치고 나의 선조만을 나타내고 방친(傍親)에 미치지 못하였음은 내가 그 일을 결정할 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종중의 모든 군자는 각각 그 선조의 아름답고 뛰어난 덕행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어찌 다시 관계하여 계승하지 않겠는가.
기축년 12월 상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