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보(第3回) 번역문

惟我沈系粤自麗代勳勩著聞建本 朝傳德襲訓寔繁以昌或毓慶沙麓爲 國妊姒或趾美槐棘贊治雍熙世代之祥德業之隆昭載 國乘而譜牒之傳尙無成書豈非病歟歲嘉靖乙巳吾宗丈콷贊胡安公按節湖南從祖父領樞公製錦昇平慨然于玆相與合謀乃因家乘査攷公譜肇成我沈氏族譜且錄先代碑文行狀於後刊印行世使覽之者足以興孝悌之心起敦睦之風二公之功不其韙歟年紀浸遠生息漸盛添錄增修在所當急而事功之成必得期會府尹公之續纂於完府亦豈偶哉余以無似襲先休躋顯仕常以德不類爲懼乃於丁丑秋祗荷 寵命分憂南服道之珍原適叅贊公表孫李君景溫爲邑宰靑城伯之裔世居珍原者亦多其麗則斯譜之重修亦一天與之幾而不可失焉者也遂使李君掌其事書字蕫功之勞則委於諸子孫而後裔之爲守令於玆道者甚多咸出俸錢以助其費用不資公功易辦集我 先祖嗣續之繁吾宗人追遠之篤益可驗矣板本始藏於順天中移於全州珍原之族合辭請曰玆縣視順與全雖小吾儕之於是本也愛之若父母敬之若神明當以死守之不亦愈於在彼乎余曰誠哉是言遂藏諸珍原噫斯譜也兩相創之於前自乙巳十有八年壬戌府尹公續修於後至今十七稔而增續之擧又値於余豈多于前功要以繼述爲幸至若雲仍之盛爵位之崇彌遠彌彰比前增光實源於祖先積善之慶忠孝之報吁其至哉繼今以徃至于百千萬年之久未知幾人能繼先志修是譜而不墮也哉聊以告吾宗之君子於無窮云 皇明萬曆紀元之六年戊寅仲秋望後二日後孫嘉善大夫全羅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靑陽君義謙敬書于羅州錦城館
(번역문)
우리 심씨의 세계(世系)가 지난 고려시대로부터 훈공이 세상에 떨쳐 전해지고 이조를 건립한 뒤로는 덕업을 계승하고 조상의 유훈을 대대로 이어받아 번무하고 창성하여 혹은 사록(沙麓)①의 경복을 받아 나라의 국모가 되고 혹은 선조의 덕화를 이어 삼공과 경상이 되어 태평성대의 정사를 도와 여러 세대의 상서로운 일과 어진 덕행과 뛰어난 공업(功業)의 융성함이 국사에 소상하게 등재되어 있지만 아직도 족보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어찌 병이 아니겠는가. 가정을사년(인종원년 1545)에 우리 종장이신 참찬 호안공(光彦)께서 전라감사가 되시고 종조부이신 영중추공(通源)께서 순천부사로 재임시에 이 보책을 닦는데 뜻을 두시고 탄식하며 서로 함께 의논하고 계획하여 바로 가승에 따라서 족보를 조사하고 상고하여 우리 심씨의 족보를 처음으로 이루고 또 선조의 비문과 행장을 족보의 후편에 기록하여 인쇄하고 세상에 널리 퍼뜨리어 열람하는 이로 하여금 족히 부모에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하는 마음을 갖게 하며 일가간에 서로 화목하는 풍교를 일으키게 하였으니 양 공의 공적이 어찌 많다하지 않으랴. 연대가 점점 멀어지고 후손의 번식함이 점점 성(盛)하여져 더 기록하고 더 보충하여 수보하는 일이 마땅히 급하게 되었거늘 사업의 성취는 반드시 시기를 얻어야 한다. 부윤공(銓)이 전주부에서 뒤를 이어서 다시 편찬한 것도 또한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내가 불민함으로서 조상의 아름다운 유훈을 이어받아 높은 벼슬에 오르고도 항상 덕을 갖추지 못하여 송구하였더니 마침내 정축년(선조10년 1561) 가을에 총애하시는 왕명을 공손히 받들고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더니 전라도의 진원(珍原:뒤에 장성현에 편입)은 마침 참찬공의 외손인 이군 경온(景溫)이 진원현령이고 청성백의 자손이 진원에서 대대로 살고 있는 이도 또한 그 수효가 많으니 이 족보를 다시 중수하는 것도 또한 하늘이 기회를 주는 것이며 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침내 이군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고 글자를 쓰고 이를 감독하고 수고로움은 모든 자손들에게 위촉하였으며 후손으로서 전라도내의 수령이 된 이가 매우 많아서 이들에게 모두 녹봉을 내어서 그 비용을 돕게 하고 다른 돈을 마련하지 않아도 성취할만한 힘을 갖추고 우리 선조의 후손이 번창함을 모두 수집하니 우리 종중사람들의 조상을 사모하는 독실한 정성을 더욱 증험할만하다. 판본을 처음에는 순천에 보관하였다가 중간에 전주에 옮기어 보관하였더니 진원에 사는 일가들이 일제히 청하여 이르기를 『이 진원고을이 순천과 전주보다는 비록 적더라도 우리들이 이 판본을 부모와 같이 사랑하고 신명(神明)과 같이 공경하여 마땅히 결사적으로 수호할 것이오니 또한 저 고을에 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성의가 있고 진실하도다』하고 마침내 진원에 두기로 하였다.
아! 이 족보는 두 분의 상공(相公)께서 을사년(인종원년 1545) 처음으로 발간하시었고 을사년으로부터 18년만인 임술년(명종17년 1562)에 부윤공께서 뒤를 이어서 다시 중수하신 후에 이제 17년이 되어서 증보하고 속수하는 일이 또한 나에게 당하였으니 어찌 선인들께서 쌓으신 공로보다 많다하리오마는 요컨대 조상의 뜻과 자손이 번성하고 관작과 지위가 융숭함은 세대가 더욱 멀어지고 오래 될수록 더욱 현창한 것과 같은데 전에 비하여 더욱 빛이 나니 선조께서 적선(積善)하시어 그에 따른 경사와 충효를 다한 보답에 근원한 것이다.
아! 지극하도다 지금 이후로 백천만년에 이르도록 계승하여 몇 사람이 잘 선조의 의지를 이어 이 족보를 속수하여서 추락하지 않을지를 알지 못하겠다. 다만 우리 종중의 군자에게 무궁하게 이어나가기를 바라노라.
      

만력기원6년(선조11년 1578) 무인 8월17일에
      후손 가선대부 전라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청양군 의겸(義謙)은
      나주 금성관에서 경서(敬書)함.

 
註① 사록(沙麓):지명으로 춘추에 사록이 무너지면 성녀가 출생한다고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