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보(第2回) 번역문 |
靑松之沈根厚流遠簪纓滿 朝俊彦輩出而 先世多故未暇及於族譜叔父右相國公作宰順天沈叅贊公按節是道相與恊意修正開刊於同府印布中外至今同宗諸人咸知一氣之所分而思勉敦睦之風者未必非此譜爲之本也第刊行已久後枝斯繁多有增續之望而事煩未就適余來尹此府承叔父命取來板本螽斯之最盛者別添一張而增廣之其或名下有餘地者粘付木尖而書刊只恨聞見不廣工役有程畧加添修未免有踈漏之歎然後嗣子孫亦豈無他日相繼而纂修者乎 先祖靑城伯碑文始成於今日故與叔父忠惠公碑文吾先人碑文並錄于後以板本藏在順天地偏而人稀未易印出故移藏于此府庶幾欲見者之便於得印云時嘉靖四十一年壬戌十二月下澣後裔嘉善大夫全州府尹銓謹跋
(번역문) 청송심씨는 근본이 중후하고 원류가 멀어서 높은 벼슬이 조정에 가득하고 지혜와 덕행이 뛰어난 이가 배출(輩出)되었지만 선대에 뜻하지 못한 일이 많아서 미처 족보를 할 겨를이 없었더니 숙부이신 우상국공(右相國公 通源)께서 순천부사로 계시고 심찬찬공(光彦)께서 감사로서 전라도를 다스릴 때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수단을 하고 순천부에서 판본을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시었으니 이제까지 동종(同宗)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기맥(氣脈)이 나뉘어졌음을 알고서 사이가 서로 화목하여지고 풍교가 이루어짐은 이 족보가 근본이 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 족보를 발간한지가 오래되었고 후손이 번창하여 증가하고 계속하여 다시 수보하기를 소망하는 이가 많이 있었지만 일이 많아 번거로워 성취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내가 이 전주부윤으로 부임하여 숙부의 명령을 받아 판본을 가지고 와서 자손이 가장 번성한 이는 별도로 한 장을 첨가하여 더 넓히고 전에 새긴 이름 밑에, 남은 빈자리가 많은 이는 판목의 끝을 붙이어서 써 새기었으니 단지 보고 들은 식견이 넓지 못하고 인쇄하는 일도 한계가 있어 간략하게 수정을 첨가하였으니 소루한 한탄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후세 자손들이 또한 어찌 훗날에 서로 계승하여 중수하는 이가 없겠는가. 선조 청성백의 비문이 오늘에야 비로소 이루어지었다. 그러므로 백부 충혜공의 비문과 나의 선친의 비문을 함께 족보의 뒤에 기록하고 판본을 순천에 간직하는 것은 지방이 협소하고 사람이 적어서 인쇄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으로 이 전주부에서 옮기어 보관하였으니 이는 판본을 보려고 하는 이가 이어서 인쇄하기에 편하게 하고자 함이다. 때는 가정41년(명종17년 1562) 임술 12월 하순에 후손 가선대부 전주부윤 전(銓)은 삼가 발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