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군지, 곡성현

〈관안(官案)〉 현감(縣監)
심동향(沈東向):무과(武科)에 급제하여 壬申 2月에 부임하고 癸酉 四月에 사임하였다.
심   엄(沈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음직으로 12月에 부임하여 己酉 正月에 사임하였다.
심정의(沈廷儀):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乙丑 8月에 부임하고 庚午 8月에 만기로 사임하였다.
심일진(沈一鎭):丙子 10月에 부임하고 己卯 五月에 흡곡현령(歙谷縣令)에 이배(移拜)되었다.
심공권(沈公權):음직으로 庚申 8月에 제배(除拜)되어 同月 부임하였고 甲子 6月에 사임하였다.
〈무과(武科)〉
심일해(沈一海):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宣傳)이었다.
심세웅(沈世雄):사직(司直)이었다.
심노헌(沈魯憲)
〈사마(司馬)〉
심준택(沈駿澤):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심세중(沈世重):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심세하(沈世夏):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심락린(沈樂麟):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심세일(沈世日):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심두영(沈斗永):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문장(文章)〉
심원붕(沈遠鵬):인수부윤공(仁壽府尹公) 후손으로 시문(詩文)을 잘하였고 소년(少年)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심원대(沈遠大):영기(英氣)와 풍신(風神)이 뛰어났고 명필(名筆)이었다.
〈인물(人物)〉
심광형(沈光亨):청성백 덕부(靑城伯 德符)의 6世孫이요 청백리(淸白吏) 망세정 선(忘世亭 璿)의 증손으로 부모의 상에 너무 슬퍼하여 몸이 야위고 3年을 시묘살이 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통독(通讀)하고 명성이 영 호남사이에 알려져 관찰사가 장계를 올려 광양훈도(光陽訓導)가 되었고 이어서 곡성(谷城) 남평(南平) 순창(淳昌) 사읍(四邑)을 거치고 만년에 강호(江湖)의 경치 좋은 곳을 골라 한 정자(亭子)를 짓고 함허(涵虛)라 이름하고 거닐며 스스로 즐기며 세상일을 잊으니 재종형 광언(再從兄 光彦)이 본도 감사(本道 監司)로써 이 정자에 와서 강산의 경치를 보고 三公과 이 강산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이를 말함인가 그러나 그대는 명문 자손으로 하나의 훈도에 그치고 강호에서 늙도록 벼슬하지 않겠는가 하니 웃으며 응답하지 않고 나이 40에 집에서 졸하다. 정조(正祖) 己未에 사림(士林)이 추모하여 구암서원(龜岩書院)을 짓고 배향(配享)하였다 .
심 학(沈  ):천품(天稟)이 순후(純厚)하고 기계와 도량이 장중하였으며 일생동안 주자(朱子)의 학문을 연구하고 효우(孝友)에 독실하였으며 명리(名利)에는 뜻을 버리고 자취를 임천(林泉)에 감추어 불의정(不倚亭)을 짓고 자호(自號)를 삼었으니 대개 중용(中庸)의 불의(不倚)의 뜻을 취한 것이요 유집(遺集)이 이 세상에 알려졌다.
심사함(沈師咸):주국(柱國)의 第二子로 문장과 도의(道義)로써 청망(淸望)이 세상에 현저하고 성품(性稟)이 지효(至孝)하여 부모의 병환에 상분하고 단지주혈하니 사림(士林)에서 여러 번 도천(道薦)하였으나 표창을 받지 못하니 세상사람이 모두 아깝게 여겼다.
심창진(沈昌鎭):효우(孝友)와 학행(學行)으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심사묵(沈師默):행의(行義)와 문학(文學)으로 당세에 중망(重望)이 있었고 송력천(宋櫟泉)의 문인이었다.
심채진(沈埰鎭):기질(氣質)이 온량(溫良)하고 행의(行義)가 초범(超凡)하며 양친(養親)제절에 그 정성을 다하고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탐구하고 부화(浮華)를 사절하니 사림(士林)이 경앙(景仰)하였다.
심두영(沈斗永):자품(資稟)이 절이(絶異)하고 얼굴이 편안하고 기운이 맑으며 아름다워 四歲에 입학하여 사서(史書)로써 가르치니 깨달음이 귀신같고 입을 열어 시를 읊으면 좌중(座中)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장성(長成)하여서는 힘써 배워 문장에 능하였고 경도(京都)에 가니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선비들이 사모하였고 시를 지어 보낸 것이 많았다.
심노종(沈魯綜):천성(天性)이 온수(溫粹)하고 의용(儀容)이 단아(端雅)하여 자량(慈諒) 개제(愷悌)로써 근본을 삼고 우유근묵(優柔謹默)으로써 法을 삼고 경전(經傳)을 힘써 읽고 사문(斯文)에 종사(從事)하여 문난(問難)에 대비하니 원근사림(遠近士林)이 종범(宗範)으로 삼았고 유집이권(遺集2卷)이 있다.
〈절의(節義)〉
심민겸(沈敏謙):광형(光亨)의 孫으로 어렸을 때부터 담력과 용맹이 과인(過人)하더니 임진왜란을 당하여 싸움에 크게 이기고 정유재란에 남원에서 포위 당하였으나 적은 군사로 강적을 막아 또 공을 세우니 명장 유정(明將 劉侹) 그 義를 칭찬하였고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려 특별히 주부(主簿)에 임명되었고 나주 충장사(羅州 忠莊祠)와 옥과구암사(玉果龜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심민각(沈民覺):甲子年 이괄(李适)의 난에 가동(家僮)과 의병 구백명(義兵 九百名)을 거느리고 천안(天安)에 이르러 역에 진을 치고 대가(大駕)를 맞았고 안현(鞍峴)에서 역도(逆徒)와 싸워 공을 세우니 己巳年에 호성공신이 되고 특별히 청안(淸安)현감에 제수 되었고 또 병자호란에 의병을 모집하여 호서(湖西)를 보장(保障)하고 강도(江都)에 군량을 운송하다가 강화(講和)하였다는 말을 듣고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고 물러나 호정(湖亭)에 돌아와 거닐며 자유롭게 살며 구암(龜岩)에서 낚시질하며 세상을 마치니 구암사(龜岩祠)에 배향하였다.
〈효자(孝子)〉
심주국(沈柱國):어렸을 때 부상(父喪)을 당하여 집례(執禮)를 성인과 같이 하더니 장성하여 어머니 박씨의 병이 위독하자 단지주혈하여 기절 하였다가 다시 회생하여 삼일의 수명을 연장하였고 부병시(父病時) 배를 먹고 싶다 하였으나 때가 아니므로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종신토록 배를 먹지 않았다.
심사함(沈師咸):주국(柱國)의 第二子로 천성(天性)이 지효(至孝)하여 부모의 병에 상분(嘗糞)하고 자지화약(刺指和藥)하여 드리니 사림(士林)에서 도학효자(道學孝子)라 하여 여러 번 글을 올렸으나 정려를 命받지 못하였다.
심항진(沈恒鎭):학()의 孫으로 평생동안 처신함에 조금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경복(敬服)하였고 어머니가 일찍이 질병(疾病)을 앓아 백약이 무효한데 사슴고기가 먹고 싶다 하니 그때 대설(大雪)로 사냥하여 잡기가 어려우므로 향을 피우고 하늘에 비는 것을 밤 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은지 이일(2日)만에 사슴 한 마리가 와서 울거늘 잡아다가 드려 병이 차도가 있어 회복되었고 돌아가자 슬퍼함이 예에 지나쳤고 삼년을 시묘살이 하며 조석으로 배례하니 무릎 꿇은 자리에 풀이 나지 않았고 사당 받들기를 생시와 같이 하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고하니 향리에서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