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고절(傲霜孤節: 서리를 이겨내는 외로운 절개)
예로부터 국화는 은일과 절조의 상징으로 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지만,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명대(明代)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국화가 화훼하의 소재가 아닌 사군자화의 소재로 다루어지게 된 것도 명대 이후라 할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국화를 소재로 한 그림들은 조선후기 이전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중기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그렸다고 전하는 국화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신빙성을 확증하기 어렵다.
따라서 조선시대 화단에서 국화 그림이 문인화의 일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은 중국의 각종 화보(畵譜)에 실린 국화그림을 본격적으로 임모(臨摹)하기 시작한 현재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오상고절>은 이를 반증하는 좋은 자료이다. 화면 좌측에 바위를 배치하고, 그 위아래에 국화를 그려 넣었는데, 『개자원하전(芥子園畵傳)』의 국화 그림들을 참고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습윤한 필치로 번짐이 많은 몰골의 기법으로 처리한 국화와 바위의 묘사는 현재 특유의 감각이며, 적재적소에 가한 담채도 별다른 의도가 없어 보이지만 화면 전체에 운율감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좌측 하단부에 그려 넣은 농묵의 바랭이풀은 담묵의 국화와 대비되면서 다소 단조로운 화면에 생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통활한 공간의 조성에도 한몫하고 있다. 화면 상단의 국화를 온전하게 그리지 않고 일부분만 그린 것도 같은 이유로 보인다. 《표현양선생화첩》에 장첩된 그림이니, 현재 나이 55세 시에 그린 작품이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