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절정(牡丹絶頂: 모란이 절정에 이르다)
바위 틈에서 벋어나온 모란 한 그루가 만개하여 절정을 이루고 있다. 예로부터 모란은 그 크기와 화려함으로 인해 화왕(花王)으로 불렀고, 부귀와 공명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이에 중국에서는 일찍이 화훼화의 소재로 가장 널리 애용되던 꽃이 모란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모란꽃을 소재로 한 그림이 중국에 비하여 크게 각광받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모란의 화려함이 담박(淡泊)하고 검약(儉約)한 미감을 추구했던 조선인들의 취향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현재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모란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당시의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화보(畵譜)류를 충실히 임모하며 자신의 회화세계를 다져갔던 현재 회화의 성격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할 듯하다. 『개자원화전』과 같은 중국의 화보에 이 그림과 같은 모란화가 대거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일(放逸)하고 화려하지만 문기(文氣)를 잃지 않은 모란의 자태나 습윤한 몰골의 모란과 갈필(渴筆)의 난시준(亂柴皴)으로 묘사한 바위의 미묘한 대비 등은 현재의 감각과 화기가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그림의 장처이다. 이렇듯 수묵의 기법으로 시각을 접근시켜 화면을 가득 채운 모란화의 형식은 조선말기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로 이어지며 발전하게 되니, 현재회화의 선구성(先驅性)을 다시 한번 확인 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