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석형란(怪石荊蘭: 괴석과 가시나무와 난)
우리나라에서 묵란화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초기부터였으나, 묵죽화나 묵매화에 비하여 그 발전이 매우 더뎠으며, 조선중기에 이르러서도 탄은 이정이나, 허주 이징 등의 묵란화가 있지만 그 수준은 묵죽화나 묵매화에 비하여 현격히 떨어지고 있다. 현재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표암 강세황은 "우리나라에는 소위 난이란 것이 없어, 진짜 난을 보지 못했으니 전신사조(傳神寫照)를 해낼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이런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듯 저조한 발전 양상을 보이던 묵란화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현재에 이르러였다. 자그마한 바위 하나에 한 포기의 난을 그리고, 형자(荊刺) 즉 가시나무를 첨가한 이 <괴석형란>은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난과 바위와 형자가 어우러진 소재는 원대 이후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묵란화의 구성요소로 자주 애용되던 통상적인 소재이지만, 소재의 구성이나 세부묘사는 이전의 묵란화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상안(象眼)이니 봉안(鳳眼)이니 하는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도 않았고, 난엽과 난화의 묘사도 사생에 대한 의지도 없을 뿐더러 굳이 서예적인 법식을 유지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손가는 대로 쳐내었을 뿐이다.
이는 단정하고 강경하면서도 사생적인 기조를 유지하던 조선중기의 묵란화와는 분명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 현재 회화의 지향처였던 명대 오파계 문인들의 묵란화와도 큰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와 동시대를 살아가며 회화이념을 공유했던 표암 강세황의 묵란화가 명대 문징명의 묵란화풍과 유사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이와 같은 묵란화는 오히려 후대 추사화파(秋史畵派) 묵란화와 계통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재의 묵란화는 조선시대 말기를 풍미했던 추사(秋史) 묵란화의 내부적인 동인으로서 충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회화의 궁극적인 의미도 바로 이런 점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