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 와룡암에서의 조촐한 모임)
심사정은 조선후기 서화와 골동의 감식가이자 대수장가였던 상고당(尙古堂) 김광수(金光遂. 1699-1770)와의 교유를 통해 중국의 문물을 포함한 많은 진적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여기 보이는 이 그림이 그러한 정황을 짐작하게 해 주는 단서가 되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바로 심사정과 김광수, 그리고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이다.
이 그림에 대한 발문을 지은 김광국은 친가와 외가가 모두 당상급의 의원직을 역임했던 의원(醫員) 가문 출신으로, 대대로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서화에 대한 깊은 감식안을 지닌동시에 조선후기 화단에 중요한 후원자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김광국이 지은 글을 통해 이들의 모임속으로 들어가 본다.
"갑자년(1744) 여름 내가 와룡암에 있는 상고자(김광국)을 방문하여 향을 피우고 차를 달여 마시며 서화를 논하던 중 하늘에서 갑자가 먹구름이 끼면서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런데 그때 현재가 문 밖에서 낭창거리며 들어왔는데, 옷이 흠뻑 젖어 있어 쳐다보고는 아연실색하였다. 이윽고 비가 그치자 정원에 가득 피어오르는 경관이 마치 미가(米家)의 수묵화와도 같았다.
현재가 무릎을 안고 주시하다가 홀연히 크게 소리치고 급히 종이를 찾아 심주(沈周)의 화의를 빌어 <와룡암소집도>를 그렸다. 필법이 창윤하고 임리하여 나와 상고당이 감탄하였다. 이에 작고 초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아주 기쁘게 놀다가 파했다. 내가 그 그림을 가지고 돌아와 집에서 감상하며 아꼈다. (원문 생략)"
김광수로 보이는 인물이 사모를 쓰고 공수(拱手)한 채 안쪽에 앉아 갓을 쓴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다. 굵은 둥치에서 연륜를 짐작할 수 있는 소나무가 오른편 언덕에서 가지 하나를 길게 드리우고 있는데 흡사 마원(馬遠)의 일각 구도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림 왼편 상단에 이런 제발을 써놓았다. 비온 뒤 와룡암에 있으면서 흥에 겨워 석전을 방작하다. (雨後 在臥龍庵 乘興 仿石田.)"글씨에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흥이 남아 있는 듯하다.
심주(沈周)의 그림을 방작(倣作)한다고 했지만 전체적으로 심주의 그림과는 판이한 느낌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심사정의 남종화 이해가 조선의 전통 산수화 표현법 특히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을 토대로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전통 화풍을 바탕으로 남종화를 이해해 나가는 심사정의 초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다. "현재(玄齋)"라는 관서와 함께 "경기문얼약무인(經其門闑若無人)"이라는 방형백문(方形白文)의 인장이 있다. (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