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낙안(平沙落雁: 평편한 모래벌에 날아 앉는 기러기)
전통 혼례식에 나무로 만들어져 놓였던 기러기는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운 비행을 하는 것으로 인해 예전부터 신예절지(信禮節智)의 덕을 지닌 동물로 여겨지면 사랑받아 왔다. 우리나라에서 기러기를 목격하는 것은 가을 걷이를 끝낸 들녘에 된 서리가 내리는 겨울의 초입이다. 이때가 되면 하늘에는 멀리서 찾아온 길손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며 특유의 울음소리로 합창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조선전기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이러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철 따라 남북으로 날지만,
어찌 곡식으로만 몸을 도모하리.
만리에 서로 불러 떠나지 않고,
뜻에 따라 맑은 상수에 내려앉는다.
강이 넓어 가을 그림자 잠기고,
하늘 맑아 새벽 서리 떨쳐낸다.
길고 따스한 모래벌에 가을볕 좋아,
물가를 따라 멋대로 나는구나.
(遂候飛南北, 謀身豈稻梁. 相呼萬里不離行, 隨意下淸湘. 江濶涵秋影, 天淸拂曉霜. 長洲沙暖好秋陽, 遵渚任飄揚,)"
(『三灘集』 卷9, 『次益齋瀟湘八景詩韻-平沙落雁』)
심사정 역시 넓게 펼쳐진 모래벌에 떼 지어 날아와 앉는 기러기들의 모습을 따스한 필치로 그려냈다. 갈대가 바람으로 인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누이고 있는 그 속에는 이미 내려 앉은 기러기들이 분주히 먹을 것을 찾고, 뒤를 이어 줄지어 내려앉는 기러기들의 행렬이 먼 하늘까지 닿아 있다.
중경에는 몇몇 침엽수와 늦게까지도 단풍 든 잎을 달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이미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찬바람을 맞고 있다. 『개자원화전』에 있는 유송년과 황공망의 잡수(雜樹) 표현법을 변용한 심사정의 나무 표현법이다. 모래벌 사이를 가로 질러 놓인 외나무 다리는 인적이 끊긴지 오래인 듯 비어 있다. 이제 이 모래벌의 주인은 기러기들인가 보다. (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