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제화정(雪霽和靜: 눈 그친 후의 고요함)
《방고산수첩(倣古山水帖)》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림이다. 계절상으로도 한 해를 정리하는 겨울인데, 왼편 상단에 있는 "계미납월방고인각법(癸未臘月倣古人各法) 현재(玄齋)"라는 관서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계미년이면 심사정이 57세가 되던 1763년(영조39)이고 납월(臘月)이면 섣달 즉 음력 12월이니, 심사정은 이 화첩을 50대 후반에 완성한 것이다. 관서 밑에는 "심씨이숙(沈氏頤叔)"이라는 방형주문(方形朱文)의 인장이 단정한 모습으로 찍혀 있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산속 도시에 이제 막 눈이 그쳐 사방이 고요속에 잠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 심원법(深遠法)으로 표현했다. 왼편에 자리한 마을은 즐비한 고루거각(高樓巨閣)으로 인해 그 번성함을 짐작할 만한데, 집집마다 모두 흰 눈을 덮어쓰고 있다. 왼편하단의 관문으로는 오가는 인마(人馬) 행렬이 꼬리를 문채 다리 건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나루에도 짐을 실은 여러 척의 배들이 돛을 접은 채 정박해 있다. 대단한 성시(盛市)인 듯하다.
이와는 반대로 폭포 너머로 우뚝 솟은 석탑과 함께 자리한 산사는 좌우의 험준한 산으로 고립되어 번잡한 속세와 단절된 적막함이 느껴진다. 설경을 잘 그렸던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그림과 달리 북송의 대관산수(大觀山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대체로 이 《방고산수첩》에 있는 그림들은 남종화보다는 북송원체화풍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는 심사정이 남종화에 본류를 두고 있으면서도 북종화의 장점을 융합하여 자신만의 기법을 창안하였던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근경의 나뭇가지 표현에 사용된 곽희(郭熙, 1020-1090)의 해조법(蟹爪法)은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吳)